교회는 우리가 믿는 하느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삼위이시며, 그러나 세 분 하느님이 아니라 한 분 하느님이심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머리로 잘 이해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는, 각각 다른 세 존재를 이야기 하면서 동시에 하느님께서 한 분이심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삼위의 독립성이 한 분 하느님의 일치성과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믿어야 하는 교리로 선포한 이 신비를 머리로 이해하려하기 보다는,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숙고해 보는 것이 더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삼위일체. 삼위의 독립성과 한 분 하느님의 일치성을 동시에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느님의 특성이 그러하다면, 그리고 세례를 통해서 그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면서, 우리가 그분의 자녀가 된다면, 우리 또한 그러한 하느님의 특성을 닮아가야 하며, 닮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의 순간에,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실 때, 수난의 잔을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수난의 잔을 받아들이신 이유는, 아버지의 강압에 의한 복종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세상을 향해 보여주신 그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자발적인 참여였습니다. 즉 강압적인 복종이 아니라, 능동적인 순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나타난 하느님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생각한다면, 겟세마니에서의 기도는 의미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기에, 하느님과 예수님이 동일한 위격이라면, 당연히 수난에 대한 일말의 고민 없이 수난을 받아들이셨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성령에 대해서 언급하시는 부분에서, 예수님과 조금은 다른 역할을 하시는 성령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우리 각자 안으로 받아들일 것을 말씀하시고, 사도행전은 성령을 받아들인 이들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사가가 6장에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에서 사용하는 단어와 20장에서 '성령을 받아라'에서 사용하는 단어를 다르게 쓰고 있음에서,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과 성령을 우리 안에 모시는 방법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성부, 성자, 성령, 삼위는 서로 다릅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도 서로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삼위의 다름이 문제로 다가오지 않는 반면, 우리는 서로의 다름 때문에 때로는 고통 받고, 힘들어 합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다름은 충돌을 가져오고, 분열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치로 나아가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일치 또한 쉽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일치가 쉽지 않은 이유와 삼위 하느님의 다름이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가 똑같습니다. 그 일치가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고, 그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기꺼이 세상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 놓으셨습니다. 성령께서도 성부와 성자의 뜻을 이어 세상 안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즉 우리가 일치를 이야기 하면서, 내 것만 주장할 때, 일치는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너를 위해서 내 뜻을 포기할 수 있어야, 우리는 진정한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포기는 맹목적인 복종이 아니라, 사랑의 순종이어야 합니다.
너와 내가 같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 앞에 동등하게 서 있지만, 너를 위해서 내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나는 희생이 있을 때, 우리도 우리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삼위일체를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