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깨닫지 못하고, 알아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이유.
오늘 주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설명하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우리는, 아니 저 같은 사람은 크게 위안을 받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닫지 못하고, 알아보지 못함이
우리 인간의 탓, 특히 저만의 탓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리 만드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다시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드셨습니까?
하느님의 악취미 또는 악의 때문입니까?
그런 것은 물론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란 것이 본래 그런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는 다 알 수 없기에 신비인 것입니다.
신비란 인간의 비밀과는 다른 하느님의 비밀이고,
아담과 하와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그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그 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면 하느님처럼 알게 되고 보게 되지만
하느님께서 허락지 않으신 그 나무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허락된 것만큼만 아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유한성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무한성을 다 알려고 욕심부리지 말아야 하고
그 무한성을 다 알 수 없는 유한성에 대해 분노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무한성에 대해 욕심 부리고 유한성에 대해 분노한다면
그것은 우리도 아담과 하와처럼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한 욕심이고,
하느님이 아니고 인간인 것에 대한 분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다 알 수 없기에 신비라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할 때
우리는 모르는 나를 들볶지 않고 오히려 신비 안에서 편안해집니다.
어린 아이는 엄마의 세계와 엄마의 능력을 다 알지 못하지만
엄마의 사랑 안에 편하게 머물고 그 사랑을 마음껏 누립니다.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는 다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다 알아야 한다고 강박적으로 생각할 필요 없고
그저 허락하시는 것만큼 알고 허락하시는 것만큼 행복을 누리면 됩니다.
알려고 하다가 사랑을 놓치지 말 것이며
다 알려고 하다가 허락된 것마저 깨닫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말 것입니다.
안다는 사람, 똑똑하다는 사람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이에게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나타내 보이시는 그 뜻을 아는 것,
그것이 아는 것이고, 알아야 할 것이고, 그것이 지혜이고 깨달음입니다.
이것을 알아듣는 우리.
이것을 알아듣는 오늘.
오늘, 우리 그리 됩시다!
문득, 이런 옛말이 떠오릅니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 가랑이 찢어진다." 이런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마디로 한계지어진 자신의 분수를 알고 주제 파악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이겠지요.
"하느님 나라는 다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다 알아야 한다고 강박적으로 생각할 필요 없고
그저 허락하시는 것만큼 알고 허락하시는 것만큼 행복을 누리면 됩니다."
라는 말씀처럼,
그 한계가 어디까지 인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분별하는 안목을 키워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고 견디리라 다시 한번 다짐하며,
"안다는 사람, 똑똑하다는 사람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이에게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나타내 보이시는 그 뜻을 아는 것,
그것이 아는 것이고, 알아야 할 것이고, 그것이 지혜이고 깨달음입니다.
이것을 알아듣는 우리.
이것을 알아듣는 오늘" 을 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