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자손들은 그 모든 여정 중에,
구름이 성막에서 올라갈 때마다 길을 떠났다.
그러나 구름이 올라가지 않으면,
그 구름이 올라가는 날까지 떠나지 않았다.”
지금 저와 행진단은 포르치운쿨라 행진의 막바지에 와있습니다.
저희는 시작 때부터 저희의 행진을 모세와 이스라엘 공동체가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을 향해 가는 것과 같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저희의 여정이 여행이 아니라 순례가 되도록,
다시 말해서 프란치스칸적인 순례자와 나그네의 여정이 되고,
저희의 계획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뜻대로 가는 것이 되도록,
매일 구름기둥 역할을 할 사람을 세워 그의 인도를 따라 행진을 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있어서 구름기둥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느님의 현존이었고, 하느님의 이끄심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성전을 세울 수가 없었고 그래서 성전이 없습니다.
계속해서 움직이는 그들이 성전을 세울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움직이는 천막 안에 성전, 곧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움직이는 그들이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던 게지요.
그리고 성막이 있는 천막 위에 구름이 머물렀습니다.
그러므로 구름기둥은 하느님이 거기에 계신다는 표시였고,
그들의 여정은 그들끼리만 하는 여정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여정이라는 표시였습니다.
프란치스코도 여행 중에 자주 주님의 현존을 만났습니다.
갑작스럽게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될 때는
망토로 방을 만들거나 옷소매로 얼굴을 덮어 하느님을 만났고
그럴 수 없을 경우에는 가슴에 성전을 만들어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구름기둥은 또한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하느님 이끄심의 표시였습니다.
길을 가는 공동체에게 있어서 언제 어디로 가야 할지를 정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고, 어떤 때는 생사가 걸리는 문제이지요.
그러니만큼 언제 어디로 가는 것을 하느님께 맡기자는 것이
바로 구름기둥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길에서 자주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기도 하고,
하느님의 인도를 받지 않고 가다가 잘못된 길로 자주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갈 곳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거나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고 말겠다고 고집을 부리곤 합니다.
심지어는 길을 따라 가지 않고
내가 가면 그것이 길이라고 교만하게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공동체는 하느님의 인도를 따라 하느님께로 가고,
하느님께로 가는 그 길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길이 되시기에
우리가 하느님의 공동체라면 그리고 진정 하느님께 가고자 한다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신 주님을 잘 따라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주님을 잘 따를 수 있겠습니까?
프란치스코의 경우 어디로 가는 것이 하느님 뜻에 맞는지 알기 위해
형제를 맴돌게 한 다음 쓰러지는 쪽으로 가는 우스운 일도 있었지만
보통의 경우 늘 복음에서 그 길을 찾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님께서 우리의 길이신데
복음이 주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적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경우 복음을 세 번 펼치곤 했지요.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름기둥이
하느님 현존과 이끄심의 보이는 표시였듯이
우리에게는 복음이 하느님께로 우리를 이끄시는
주님의 현존과 이끄심의 보이는 표시입니다.
고행의 길에 함께하시는 한 분 한 분을 떠올리면 아는 것과 실천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걸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싶습니다.
\"복음이 하느님께로 우리를 하는님의 현는과 이끄심의 보이는 표시\"임을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이 제 삶의 현주소이고 아픔입니다.
구름기둥을 무시하고 따라 가지 않는다면그 구름기둥은 마음의 우울로 내려 앉게 된다는, 그것이 바로 사필귀정이 아닐까 싶지요.
문득 \"눈물없이는 무지개를 볼 수 없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