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올해로 제가 출가한지 43년이 되었는데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당황스럽게도 저의 출가가 과연
주님을 따르기 위한 출가였는지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한 건지 신부가 되기 위한 건지.
주님을 따랐는지 주님의 가르침을 따른 거였는지.
주님을 따라간 건지 그저 나의 길을 간 거였는지.
이런 것들이 석연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하나 식별을 해나갔습니다.
요즘 성소자들이나 젊은 신부들에 대해서 주님의 부르심에 따르기보다
여러 직업 중에 하나로 신부가 되려 하거나 그렇게 신부가 되었다고
선배신부들이나 신자들이 걱정을 하는데 나도 그랬던 것은 아닐까?
이것은 결단코 아니었고, 지금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결혼생활이 싫어서 이 삶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이것도 결단코 아니었고, 지금도 아닙니다.
부모님 관계가 나쁘지 않았기 때문인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어 가난하기는 했어도 비교적 화목했기 때문인지
결혼생활이나 가정생활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거의 없습니다.
저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한 사람을 사랑치 않고,
모두를 구원하겠다는 거창한 이상을 가졌기 때문에
신부가 되려고 했고 결혼생활과 가정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신부나 수도자가 된 것은 적어도 이런 것 때문이 아니고,
제가 주님을 정말 따르기 위해 수도생활을 한 것인지 의문이 드는 것도
이런 것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들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 때문일까요?
저는 분명 주님의 가르침에서 부족하지만 깨달음을 얻었고,
복음에서 가야 할 길을 찾았으며 행복도 찾았습니다.
그리고 가정을 포기했지만 수도공동체를 얻었고,
안정과 안락을 포기했는데 오히려 더 큰 안정을 얻었으며,
나의 재산을 포기했지만 더 큰 풍요와 명예를 얻었고,
무엇보다도 누구와 무엇에 매이지 않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이 가난의 자유 때문에 사랑을 얻었고,
이 자유로운 사랑 때문에 열정을 가지고 이상을 추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바로 이런 것들이 문제입니다.
저는 제 이상을 쫒았고 이상을 따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상을 발견하고 그 이상을 따랐지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포기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나의 이상을 위해서, 나의 행복을 위해서 포기한 것입니다.
참 슬프고 얼마간 허무합니다.
40년 넘게 수도생활을 하고도 이러하니.
그래도 제 안에서 주님께 대한 사랑이 조금씩 자라니,
70이 넘고, 80이 넘으면 그때라도 주님을 제대로 사랑하고 따를 수 있을지.
좀 잘 살아야 겠다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갖을 수 있는
마음 깊은 곳에 늘 품고 있었던 고뇌를 신부님께서 대신 언어화해 주신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성경소구 지혜 7,13-14에서,
"나는 지혜를 욕심을 채우려고 배우지 않았다. 이제 그것을 아낌없이 남에게 주겠다.
나는 지혜가 주는 재물을 하나도 감추지 않는다. 지혜는 모든 사람에게 한량없는 보물이며
지혜를 얻은 사람들은 지혜의 가르침을 받은 덕택으로 천거를 받아 하느님의 벗이 된다."
그렇습니다.
누군가를 존경하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바라보기도 아까운 사람.... 이런 만남을 갖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마한 기쁨인지 조금은 알것 같습니다.
"그래도 제 안에서 주님께 대한 사랑이 조금씩 자라니,
70이 넘고, 80이 넘으면 그때라도 주님을 제대로 사랑하고 따를 수 있을지."
라는 말씀이 제 영혼을 두두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