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10일 일요일 사순 제1주일
오늘은 사순 제 1주일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인류구원을 한 주기로 하는 교회의 전례력 안에서 바라보면, 사순 시기는 예수님의 부활과 연결되어 있는, 예수님의 부활을 보다 잘 준비하는 기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은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자신의 부족한 점만을 바라보며 한숨으로 지내는 그러한 무거운 사순 시기를 보내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사순시기는 오히려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부활을 바라보며, 기쁘고 희망찬 시선으로 부활을 준비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악마로부터 세 가지 유혹을 받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악마는 예수님을 이렇게 유혹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돌을 빵으로 바꾸어 보라는 유혹,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 보라는 유혹, 그리고 악마에게 경배해 보라는 유혹입니다.
유혹이라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것을 그러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거짓을 참된 것으로 보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신문이나 TV, 인터넷의 광고들을 잘 살펴보면, 우리는 그것들이 꼭 필요하지 않는데도, 필요한 것처럼 우리를 충동하는 측면들을 볼 수 있습니다. 꼭 매스컴을 통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많은 유혹들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난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유혹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신앙인에게 있어서, 무엇이 거짓이며, 무엇이 참된 것입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유혹은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 유혹은 어느 곳에나 있습니다. 크고 작은 유혹들이 언제나 우리들 주위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우리가 너무도 쉽게 지나치고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유혹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리에 내가 서있으려는 유혹입니다. 죄에 죽고 하느님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난 우리가, 하느님께 나의 모든 주도권을 내어 드리지 못하고, 내가 하느님인양 행세하려는 유혹입니다.
광야에서 40일간을 단식하신 예수님께서는 악마로부터 세 가지 유혹을 받으십니다. 또한 오늘 제 1독서에서 아담과 하와는 뱀으로 표현되는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습니다. 이 두 가지 유혹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나의 모든 주도권을 내어드리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선택하는 것이 두 가지 유혹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악마가 요구하는 그러한 모든 것을 하실 능력이 있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고,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반면,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결국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죄를 범하고 맙니다. 예수님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악마로부터 똑같은 유혹을 받지만, 정 반대의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너무도 다릅니다. 오늘 제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곧,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죄를 지어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구원으로부터 멀어졌으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는 순종을 통해서, 모든 인류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유혹에 대한 선택의 결과는 이처럼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매일의 삶 가운데서 예수님의 선택을 할 수도 있고, 아담과 하와의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태어난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성호경을 통해,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성호경은, ‘나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으며’, 무슨 일을 하든지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한다는 신앙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나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내가 하고싶은 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는 결심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가장 완벽한 기도인 주님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가장 먼저 청해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그렇지 못합니다. 하루를 살아가면서도, 크고 작은 많은 어려움들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나는 내가 어려움 중에 있는 그 순간에 무엇을 생각합니까? 내가 어려울 때에도, 언제나 나의 곁에 계시는, 나를 사랑하시는 그 분의 도움을 청하며, 나도 하느님과 함께 그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합니까? 아니면, 나 혼자만의 힘으로 그 어려움들을 해결하고자 힘들어 합니까? 왜 하필이면 나에게 그러한 어려움들이 오는가? 를 하느님께 불평합니까? 아니면, 하느님께서도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들을 잘 아시고, 내가 겪는 그 시련에는 분명히 하느님의 뜻이 있을거야? 라고 생각하며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드립니까?
우리는 사순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사순 시기는 나의 모든 주도권을 온전히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시기이며, 나의 구원을 온전히 그 분께 맡겨드리는 것을 배우고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나약함을 겸손되이 고백하고, 우리가 힘든 바로 그 때 하느님을 떠올리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릴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그 구원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있습니다. 구원은 하느님께서만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그 분께 내어드리는 복된 사순 시기가 되도록 합시다.
잠시 묵상하시겠습니다.
오늘은 사순 제 1주일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인류구원을 한 주기로 하는 교회의 전례력 안에서 바라보면, 사순 시기는 예수님의 부활과 연결되어 있는, 예수님의 부활을 보다 잘 준비하는 기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은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자신의 부족한 점만을 바라보며 한숨으로 지내는 그러한 무거운 사순 시기를 보내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사순시기는 오히려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부활을 바라보며, 기쁘고 희망찬 시선으로 부활을 준비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악마로부터 세 가지 유혹을 받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악마는 예수님을 이렇게 유혹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돌을 빵으로 바꾸어 보라는 유혹,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 보라는 유혹, 그리고 악마에게 경배해 보라는 유혹입니다.
유혹이라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것을 그러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거짓을 참된 것으로 보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신문이나 TV, 인터넷의 광고들을 잘 살펴보면, 우리는 그것들이 꼭 필요하지 않는데도, 필요한 것처럼 우리를 충동하는 측면들을 볼 수 있습니다. 꼭 매스컴을 통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많은 유혹들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난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유혹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신앙인에게 있어서, 무엇이 거짓이며, 무엇이 참된 것입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유혹은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 유혹은 어느 곳에나 있습니다. 크고 작은 유혹들이 언제나 우리들 주위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우리가 너무도 쉽게 지나치고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유혹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리에 내가 서있으려는 유혹입니다. 죄에 죽고 하느님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난 우리가, 하느님께 나의 모든 주도권을 내어 드리지 못하고, 내가 하느님인양 행세하려는 유혹입니다.
광야에서 40일간을 단식하신 예수님께서는 악마로부터 세 가지 유혹을 받으십니다. 또한 오늘 제 1독서에서 아담과 하와는 뱀으로 표현되는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습니다. 이 두 가지 유혹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나의 모든 주도권을 내어드리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선택하는 것이 두 가지 유혹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악마가 요구하는 그러한 모든 것을 하실 능력이 있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고,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반면,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결국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죄를 범하고 맙니다. 예수님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악마로부터 똑같은 유혹을 받지만, 정 반대의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너무도 다릅니다. 오늘 제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곧,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죄를 지어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구원으로부터 멀어졌으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는 순종을 통해서, 모든 인류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유혹에 대한 선택의 결과는 이처럼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매일의 삶 가운데서 예수님의 선택을 할 수도 있고, 아담과 하와의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태어난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성호경을 통해,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성호경은, ‘나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으며’, 무슨 일을 하든지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한다는 신앙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나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내가 하고싶은 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는 결심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가장 완벽한 기도인 주님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가장 먼저 청해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그렇지 못합니다. 하루를 살아가면서도, 크고 작은 많은 어려움들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나는 내가 어려움 중에 있는 그 순간에 무엇을 생각합니까? 내가 어려울 때에도, 언제나 나의 곁에 계시는, 나를 사랑하시는 그 분의 도움을 청하며, 나도 하느님과 함께 그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합니까? 아니면, 나 혼자만의 힘으로 그 어려움들을 해결하고자 힘들어 합니까? 왜 하필이면 나에게 그러한 어려움들이 오는가? 를 하느님께 불평합니까? 아니면, 하느님께서도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들을 잘 아시고, 내가 겪는 그 시련에는 분명히 하느님의 뜻이 있을거야? 라고 생각하며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드립니까?
우리는 사순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사순 시기는 나의 모든 주도권을 온전히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시기이며, 나의 구원을 온전히 그 분께 맡겨드리는 것을 배우고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나약함을 겸손되이 고백하고, 우리가 힘든 바로 그 때 하느님을 떠올리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릴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그 구원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있습니다. 구원은 하느님께서만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그 분께 내어드리는 복된 사순 시기가 되도록 합시다.
잠시 묵상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