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에 이어 오늘의 로마서도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얘기하며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였다.”
믿었기에 희망이 없어도 희망을 하였다는 말로 읽힙니다.
그런데 희망이 없어도 희망을 한다는 게 도대체 뭔 말입니까?
희망이 없는데 뭘 희망을 한다는 것입니까?
희망이 없는데도 희망하는 것이 신앙인의 희망이고,
희망이 없는데도 희망하는 것이 영적인 희망입니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세상 사람들, 보통 사람들은
자기의 희망이 가능성이 있을 때 그것을 희망하거나 소망하고,
그 희망의 가능성을 자기나 다른 사람 안에서 찾습니다.
그런데 자기든 남이든 인간에게서 아무런 희망을 찾을 수 없을 때
이들은 아무런 희망이 없고 절망하게 되지요.
이에 비해 믿는 이들은 이때 희망을 하느님 안에서 찾습니다.
사람들에게서 아무런 희망을 볼 수 없을 때
오히려 하느님에게서 희망을 찾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불이 꺼질 때 하늘의 별이 보이고 달이 보이는 법입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불이 꺼질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늘을 보고, 별을 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을 믿기에
아무 것 없어도 절망하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희망을 찾으며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가도
아무 걱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희망이 아니라 절망을 거스르는 희망을 우리는 갈망합시다.
절망속에서도 희망할 수 있는 것이 십자가가 상징하는 의미이고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부활이 태동한다는 믿음이 없다면 끝도 없어 보이는 절망적인 상황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요...
말은 쉽지만 순간 순간 세포속으로 다가오는 고통의 밀도는 또 다른 차원이겠지만........요.
그래서 오늘도 하느님안에 희망을 찾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