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무거운 짐이 무엇일까 생각해봤습니다.
예를 들어서 물리적으로 무거운 짐은 몇kg 이상일까요?
50kg을 질 수 있는 사람에게는 40kg은 가볍고
10kg을 질 수 있는 사람에게는 30kg도 무겁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무거운 짐이란 사람에 따라 매우 주관적이라는 얘기지요.
그런데 무거움의 주관성은
질 수 있는 능력, 곧 힘에 의해서만 갈리지 않고
짐을 지려는 자세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 짐도 안 지려는 사람에게는 10kg도 꽤나 무겁고
더 많은 짐을 지려는 사람에게는 50kg도 그리 무겁지 않습니다.
아니, 그리 무겁지 않다기보다는 그리 고생스럽지 않습니다.
짐꾼에게는 짐이 무겁고 짐을 지는 것이 고생스러운 것이지만
등산객에게 짐은 무거워도 짐 지는 것이 고생스럽지는 않지요.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 당신에게 와서 배우면 안식을 얻을 거라 하시고,
당신의 멍에로 짐을 지면 그 짐은 가볍다고 하셨을 때
그 배운다는 것이 무엇을 배우는 것인지,
그 안식이란 것이 어떤 안식인지,
그 멍에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주님의 멍에로 짐 지는 법을 배우면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벼워짐으로써 마음의 안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금 더 풀이하면 주님의 멍에는 <온유와 겸손>입니다.
온유한 마음과 겸손이라는 멍에를 메면 우선 멍에 자체가 편합니다.
야생마 길들이는 것을 TV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양생마란 너무도 사납고 거칠어서 안장을 얹거나 사람이 올라타려고 하면
길길이 날뛰어 도무지 어떻게 할 수 없게 만들지요.
이런 말을 길들여야지만 사람도 타고 짐도 실을 수 있는데
길들인다는 것은 아무런 것도 자기 등에 허용치 않으려는
거칠고 사나운 말을 온순하게 만들어
짐을 싣거나 사람이 타는 것을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온유와 겸손은 <왜 내게 이런 짐이?>하고 거부하던 것에서
<왜 내게 이런 짐이 주어졌을까?>하고 의미를 찾는 것으로 바뀐 자세지요.
요즘 와서 사람들이 점점 책임을 맡지 않으려 하고
부담스럽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는데
제 생각에 부담스러움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일이나 책임에 대한 부담과 사람에 대한 부담입니다.
힘든 일이나 무거운 책임은 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지고 싶지 않을수록 더 무겁지요.
사람도 부담스러워 합니다.
편치 않은 사람, 거북한 사람이 있습니다.
며느리에게 시어머니
젊은이에게 어르신들
회식자리에 직장상사들이 보통 이런 존재지요.
그런데 자식에게 어머니가 부담스럽고,
아니 어머니에게 자식이 부담스럽습니까?
그렇다면 더 이상 어머니와 아들이 아니고,
더 이상 사랑의 관계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짐도 부담스럽지 않고 편하게 지려면
온유와 겸손에 바탕을 둔 사랑이 필요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