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령을 듣자마자 바로 “예”할 수 있는 사람은 두 가지입니다.
대단한 성인이거나 하느님을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이거나.
사실 주님의 명령을 듣자마자 바로 “예”할 수 있는 사람은
성인이며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의 경지에 도달한 성인입니다.
공자는 이 경지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나이 70이 되면 욕심이 가는 데로 해도 법에 어긋남이 없는 경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그런 사람의 경지를 얘기하는 거지요.
그런데 이렇게 되기까지 인간은
30세에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자기의 뜻을 세우고(立志)
40세에는 어떤 유혹이 있어도 그 뜻이 흔들리지 않으며(不惑)
50세에는 자기의 뜻을 넘어 하느님의 뜻을 알고(知天命)
60세에는 하늘의 명령이 귀에 거슬리지 않는(耳順) 단계를 거쳐야하지요.
사실 대다수의 인간은 이런 단계를 거치지 않기에
70이 되면 욕심만 많고 고집만 세어 외톨이가 되고 마는데
나이의 성숙이 30을 넘지 못하거나 멈춰버렸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참으로 많은 사람이 나이 30이 넘도록
아직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방황을 하고,
아직도 본능과 욕망에 끌려 이렇게도 살고 저렇게도 살며,
그렇게 사는 것이 70살이 되기까지 굳어져 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작은 아들은
나이를 그리 먹었어도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느님마저도 전혀 고려치 않는 교만한 사람이거나
그것이 아니면 정말 자기밖에 모르는 철부지입니다.
그에게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밖에는 없고
그것에 너무 몰두해있기에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조차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은 겨를이 없는 사람입니다.
국어사전에서는 ‘어떤 일을 하다가 다른 일이나 생각으로
돌릴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라고 <겨를>을 정의하는데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 시간적인 여유만 없겠습니까?
무엇보다도 마음의 여유도 없는 사람인 것이지요.
예를 들어 게임에 빠져 있는 어린아이는 자기를 위해
밥 먹으라는 얘기조차 놀이 때문에 건성으로 ‘예’하는데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라면 자기를 위한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하느님에게도 내어줄 시간이 없을 것이고
그래서 대답은 건성으로 하고 아무 행동을 안 하겠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알면서도
‘노’라고 하고 그것 때문에 잠시 또는 내내 괴로워한다면
그만큼 하느님을 중히 생각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저를 반성해봅니다.
제가 딱 이런 수준인 것 같습니다.
지천명, 곧 하느님의 뜻을 잘 압니다.
그리고 이순, 그 하느님의 뜻이 듣기 싫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것 하느라 하느님 뜻을 실천치 않습니다.
이렇게 계속 가면 제가 70살이 되었을 때
제가 원하는 대로 하고 욕망대로 해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는 그런 경지에 제가 도달할 수 있을까요?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생애를 끝내갈 무렵 두고 떠나는 형제들을 위해
“전능하시고....자비하신 하느님,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당신 때문에 불쌍한 저희로 하여금 실천케 하시고,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항상 원하게 하시어,”라고 기도를 하였는데
진정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제가 원하는 것이 되도록 제 입맛이 바뀌고
세상 욕망이 하느님 갈망으로 바뀌게 되길 바라고 기도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