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탄, 그리고 주님의 백성과 이스라엘 집안이
칼에 맞아 쓰러진 것을 애도하고 울며, 저녁때까지 단식하였다.”
다윗은 사울과 관련하여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하느님 손에 맡기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결국 사울은 전쟁에 나가 죽게 됩니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영환지 책인지 제목만 본 적이 있는데
우리는 다윗을 통해서 복수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맡기는 것이 인간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현명함임을 배웁니다.
물론 복수심이 너무 강해서 하느님을 포함하여 나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서 죽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이 있지요.
그 사람은 꼭 내 손으로 죽여야만 속이 풀리는 것입니다.
사실 복수심이 마음 안에 너무 가득하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내가 같이 죽을지라도 꼭 내 손으로 복수 해야만 직성이 풀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신앙인이라면 내 마음 안에
하느님도 계실 곳이 없을 정도로 복수심이 가득하면 안 되겠지요.
그런데 신앙인이고 내 마음 안에 하느님이 계시지만
마음 한켠에 복수심도 어쩔 수 없이 있을 수 있지요.
하느님이 계시지만 미움이 내 안에 같이 있듯이.
이때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복수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금상첨화지만
그렇게까지 기도할 마음이 도저히 생기지 않으면
복수의 마음을 그대로 기도로 바치는 것입니다.
제 손에 피 묻히기 싫으니 주님, 당신이 복수해주세요!
제발 저 인간에게 벌을 내려주세요!
이렇게 기도해도 되나 하고 생각하는 분이 많지요.
휘돌리지 않고 답을 하면 이렇게 기도해도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복수심을 혼자 안고 씨름하거나
우리가 직접 복수에 나서는 것보다
이 문제를 당신과 의논하고 당신이 대신 복수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과의 의논, 이것이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찬미와 흠숭과 감사의 기도도 기도이고, 최고의 기도이지만
청원기도도 기도이고, 의논의 기도도 아주 훌륭한 기도입니다.
인간하고 의논하거나 점쟁이와 의논하는 것보다
하느님 당신하고 의논하는 것을 하느님은 무척 좋아하실 겁니다.
시편기도를 보면 이런 기도가 많고 다윗도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랬기에 오늘 다윗은 사울의 죽음에 대해 무척 슬퍼하며 단식까지 합니다.
자기가 직접 복수를 하여 죽였다면 통쾌했을 텐데
복수의 마음이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마음으로 바뀐 다윗은
하느님의 사람이 그렇게 끝을 맺는 것에 대해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이 너무 불쌍한 거지요.
임금이었던 이가 그렇게 죽는 것이 불쌍하고,
하느님으로부터 기름부음받은이가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았으니 불쌍하고,
자기도 하느님으로부터 기름부음받은이로서 같은 운명이 될 수 있으니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슬퍼하며 그를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튼 신앙인이고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적대자였던 사람이 죽었다고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덕인조차도 적대자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데 신앙인이라면
더욱 그러해야 마땅함을 사울과 다윗의 관계를 통해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