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나는 지금 생명을 만끽하며 살고 있는가?
나는 지금 행복에 겨워 살고 있는가?
아니면 죽지 못해 살고, 그냥 살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말에 죽지 못해 산다는 것은 아주 부정적인 표현입니다.
죽을 용기만 있어도 죽고 싶을 정도로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고 무의한데도 용기 없어서 꾸역꾸역 산다는 뜻이요,
죽지만 않았지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는 거지요.
그런데 이와 비슷한 또 다른 부류의 잘못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살아 있으니까 그냥 사는 식으로 잘못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두 부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래서 이렇게 잘못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은 죽음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고,
살아 있으니까 그냥 사는 사람은 삶을 선택하지 않은 것인데
더 정확히 얘기하면 행복한 삶을 적극적으로 선택하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불행하지 않은 정도로만 행복을 살고,
죽지 않은 정도로만 삶을 살려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오늘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놓고 분명하게 선택을 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렇게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면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그리고 주저함 없이 생명과 행복을 선택할 거 같은데
우리는 어찌하여 선택치 않고 그래서 선택하라는 재촉을 받는 겁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비겁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불행하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치 않으려는 비겁함과
행복하지 않은 자신과 진지하게 직면치 못하는 비겁함입니다.
그 결과 우리에게는 행불행을 사는 네 가지 부류가 있게 됩니다.
1) 자기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2) 불행하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
3)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
4)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여기에 살을 더 붙이면
자신이 참으로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행복을 나누는 사람.
불행하지 않은 것으로 행복하다고 착각하며 자위하며 사는 사람.
행복하지 않음을 인정하기에 행복을 찾기 시작하는 솔직한 사람.
자신의 불행을 인정할 뿐 아니라 불행에 함몰되어 사는 진짜 불행한 사람.
그러므로 오늘 주님의 재촉은 비겁하게 자신을 계속 속이며 살지 말고
현재의 나의 상태를 직시하고 용감하게 선택하라는 행복에의 초대인데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렇게 비겁하게 되는 것입니까?
앞에서 본 것이 비겁함의 네 가지 결과라면 비겁함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생명과 행복을 선택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다시 말해 누구나 생명과 행복을 선택하고 싶지만 문제는
생명을 선택하려면 죽음도 선택해야 하고,
행복을 선택하려면 십자가의 고통도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오늘 신명기에서 생명과 행복을 얻고자 하면 하느님을 선택해야 하고,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야 한다고 하시는데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하시고
이어서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고 하시지요.
그러므로 자기도 버리고 십자가도 질만큼의 사랑이 우리게 있어야 함을
다시 한 번 묵상하는 오늘이고 이번 사순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