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오늘 이 말씀은 저에게 양가兩價의 말씀입니다.
악인이나 선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 사랑하시는,
그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극찬을 드립니다.
그런데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는,
그 사랑의 명령에 대해서는 부담을 아주 많이 느낍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사랑은 너무도 달콤하지만
그 하느님의 사랑을 내가 해야 한다면 그것은 괴롭습니다.
제가 옛날에 그랬습니다.
우리의 선배 프란치스칸인 콜베 성인이 다른 사람을 대신해 굶어죽은,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역시 프란치스칸이야!’ 하는 자부심도 컸지만
제가 군대 가서 꼴베 성인처럼 막상 먹을 것을 나눠 먹으려 하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고 결국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제가 깨달은 것은
사랑이란 자기만족을 초월해야지만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얘기지요.
왜냐면 자기만족이란 나 중심적인데 비해 사랑이란
너 중심적이고 너를 위해 나의 만족을 희생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여러분도 그러시겠지만 저는 참으로 저 중심, 자기만족적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다른 사람을 위하거나 배려할 줄 전혀 모르고,
아무도 사랑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무던히도 남을 이해하려고 하고 배려하려고 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또한 무던히도 남이 내 마음에 들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신이 내 발에 꼭 맞기를 바라듯이
남이 내 마음에 꼭 맞기를 바라는 거지요.
이러한 너, 저러한 너이기를 바라고,
바라는 너일 때는 좋아하고 그래서 사랑하기도 하지만
바라는 너가 아닐 때는 싫어하고 그래서 미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너라는 사람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너의 이러저러함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과 혼동하고,
사랑한다는 사랑 고백을 ‘나 너 좋아해!’라고 고백하곤 하지요.
그런데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실은 정 반대입니다.
좋아하는 것은 좋은 것을 자기가 소유하려는 것인데 비해
사랑하는 것은 좋은 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는 겁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으로 발전을 했다 해도
좋을 때만 사랑하고 싫어지면 즉시 미움으로 바뀌게 되어
좋아하는 사람, 곧 선인에게는 비와 햇빛을 주지만
싫어하는 사람, 곧 악인에게는 비와 햇빛을 주지 않습니다.
이렇게 선인, 악인이 내 마음대로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은 선인이고 내 마음에 안 들면 악인이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남이 내 마음을 다 알 수 있으며
안다고 한들 어찌 그리고 왜 내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겁니까?
내 마음에 들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사랑이 아닐뿐더러
내 마음에 들어야 사랑하려고 할 때 사랑할 수가 없을 것이고,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려는,
그런 사랑의 의지와 노력은 있어야 하고,
그래야지 하느님께서 사랑할 수 있는 은총주심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