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구라고 자처하는 것이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신지 밝히라고 이렇게 요구하자
예수께서는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한 다음,
그러니까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 다음,
하느님을 아는 분이라고도 하십니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그런데 이 말씀이 하느님은 당신만 아신다는 얘기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는 말씀인지 생각게 합니다.
헌데 그렇습니까? 우리도 하느님을 알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도 이제 하느님을 알기는 합니다.
그러나 들어서 아는 것이고 소개로 아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전체적으로 하는 얘기는 이런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계셨기에 하느님을 눈으로 보고
경험적으로 아는 분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고,
우리는 그 분이 알려주셔서 아는 것이고 알려주신 정도만 아는 겁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아는 것도 전부를 아는 것은 그리스도뿐이시고,
우리는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듯 일부를 신비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렇게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프리카에서 살다가 돌아와 거기서 자기가 만난
아프리카 사람과 아프리카 문화에 대해서 들려줍니다.
그래서 그것을 들은 사람도 자기가 들은 아프리카 사람과 문화를
알기는 알고 결코 모른다고 할 수 없지만 들려준 만큼 알고
결코 경험적으로, 다시 말해서 내가 직접 보고 아는 게 아니지요.
저는 가보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청산도입니다.
제가 아는 사람이 청산도가 참 좋다고도 했고,
옛날 제가 감명 깊게 봤던 서편제의 장면이 청산도 장면이었기에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그런데 <가보다>는 것은 가서+보다는 말입니다.
청산도는 제가 영화 화면으로는 본 곳이지만 가서 직접 본 곳이 아니고,
그곳의 바람을 제 뺨으로 맞고, 그곳의 보리를 제 발바닥으로 밟아보고,
그곳의 골목길과 담장길을 제가 직접 걸어본 것은 아니지요.
우리가 하느님을 아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직접 보신 그리스도만 완전히 아시고
우리는 그분이 들려주신 것만큼만 알고 불완전하게 압니다.
그러면 정말 그렇게 알고, 그 정도만 아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느님을 경험적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겁니까?
아닙니다.
우리 머리로는 다 알 수 없어도 경험적으로는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은 사랑이시니 사랑을 하면 하느님을 경험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만큼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욕심 없이 사랑하면 더 순수하게 하느님을 알고,
원수까지 사랑하면 더 깊이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안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아는 것이고,
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때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감성에 젖어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것을 알려주신 분이 바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께로 가는 길 또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심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