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셉 대축일이지만 어제에 이어 정체성 얘기를 하겠습니다.
복음은 요셉을 어떤 분으로 얘기하는지, 그런 얘깁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한 마디로 요셉의 정체성을 압축합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하나는 관계적 정체성으로 마리아의 남편이라고 요셉을 얘기하고,
다른 하나는 존재적 정체성으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관계적 정체성 차원에서 볼 때
마리아의 남편이 더 우선적인 정체성인지 의문입니다.
근자에 나온 새로운 미사지침은 성찬의 전례에서 “영원으로부터
주님의 사랑을 받는 하느님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 이어
“그 배필이신 성 요셉”을 넣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왜 요셉을 마리아처럼 주님의 사랑 받는 아버지 요셉이라 하거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 요셉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마리아는 친 어머니인데 요셉은 친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입니까?
그런 거 같습니다. 마리아의 예수님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요셉은 예수님의 아버지 자리를 성령께 빼앗긴 것이거나 내어드린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빼앗긴 겁니까, 내어드린 겁니까?
제 생각에는 두 가지 다입니다.
요셉은 아내와 아들을 다 빼앗겼습니다.
빼앗겨서 자기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제 생각에는 요셉의 가난한 동정입니다.
재산이 없는 것보다 더 가난한 것이 내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스스로 결혼하지 않았거나 스스로 자식을 두지 않았다면 다른 얘기지만
진정 제일 가난한 것은 내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아내와 자식을 빼앗길 때 분노치 않고, 거부치 않았습니다.
내어드렸고 봉헌하였습니다.
내 아내를 하느님의 정배로 내어드렸고
내 아들을 하느님의 아들로 봉헌했습니다.
왜냐면 내 아내와 내 아들이 사실은 내 아내와 내 아들이 아니고
본래 하느님의 정배와 아들임을 알았거니와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봉헌이나 정결이나 다 되돌림의 가난일 뿐입니다.
그러고 보면 그의 의로움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가 의로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의를 은총으로 받아 지닌 것입니다.
물론 이 때 하느님의 의가 자기 안에서나 세상에서 이루어지기 위해
자기의 의가 없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에 대해 오늘 바오로 사도는 로마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자신이 예수의 아버지가 되고
영적인 자녀들의 아버지가 되기에 합당한 의로움은
율법의 충실한 준수에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라는 겁니다.
요셉도 처음에는 율법대로 하려고 하였고
그런 의로움을 지니고 실천하는 정도의 유다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개입을 체험한 순간
율법을 통한 자기 의로움은 포기하고
오직 하느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의를 받아 지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위해 진정 모든 것을 봉헌한 참으로 가난하고 의로운 요셉입니다.
그의 가난과 의로움을 기리며 본 받기로 결심하는 오늘 그의 축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