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평화를 빕니다.
얼마 전, 저는 학교 도서관에서 심리학 관련 책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인간은 스트레스를 받거나 위급한 상황을 맞게 되면 스스로를 방어하려는 방책, 곧 방어 기제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 방어 기제에는 억제, 합리화, 부인 등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은 방어 기제 중에는 이러한 현상도 있다고 합니다.
곧, 극도의 불안이나 공포에서 벗어나려고 당면한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고 ‘어떻게 잘 되겠지.’ ‘나는 괜찮을 거야.’ ‘무슨 큰일이야 벌어지겠어?’ 하는 식입니다. 일단 문제를 낙관적으로 보면서 그 두려움의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이 심리는 눈앞의 두려움을 잊게 해줄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말씀 중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지만, 믿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은커녕 하느님의 진노를 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은 삶의 근본적인 결단을 요구하시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고 진정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지며, 믿음의 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말씀에 개의치 않거나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마음에 걸리면서도 “뭐, 어떻게 되겠지. 사랑의 하느님께서 설마 나를 지옥에 버리시겠어?” 라는 식의 막연한 희망으로 일관하는 자세를 버려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문제 해결은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유지하면서 정의와 사랑이라는 하느님의 두 속성을 받아들이는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나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믿음의 삶으로 돌리는 것 이라고 생각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과 불신, 생명과 죽음 사이에서 결단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이는 미래가 아니라 지금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이 곳에서 해야 할 결단입니다.
요한 묵시록 3장 2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지금 내 집 문 앞에 서시어 결단의 문을 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 라는 사람은 믿음을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용기”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믿음이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것이라면 믿음에 왜 ‘용기’가 필요하다고 할까요? 바로 하느님 사랑의 깊이는 우리 인간이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 됩니다. 그 끝을 모르는 사랑의 심연에 나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고 뛰어드는 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고 행하는 믿음이 아닐지 또한 그렇게 행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 하루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