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사도행전에서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를 전도여행의 동반자로 택하며
유다와 그리스 혼혈인 티모테오에게 할례를 행합니다.
“바오로는 티모테오와 동행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그 고장에 사는 유다인들을 생각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베풀었다.”
그런데 이 애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혼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제까지 독서에서 할례를 요구하는 유대인들 때문에 예루살렘까지 가고
사도회의에서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까지 얻어냈는데
오늘 독서에서는 디모테오에게 할례를 받게 하고 있으니
바오로 사도가 우리 눈에는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처럼 보이고,
심지어 기회주의자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런 것입니까?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이고, 기회주의자처럼 처신 하는 겁니까?
나쁘게 이해하면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다고 좋게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제가 술을 먹는데 누구하고는 술을 같이 먹고,
다른 누구하고는 술을 같이 먹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차별로 그렇게 할 수가 있고,
사랑으로 그렇게 할 수도 있지요.
좋아하는 사람이나 부자들과는 술을 먹고
싫어하는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들과는 술을 먹지 않는다면 그것은 차별이고,
축하받을 일이 있거나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사람과는 술을 마시고,
병자나 술중독자와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지요.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가 새로운 선교지에서 만날 유다인들 때문에
티모테오에게 할례를 베풀었다는 얘기를 우리가 좋게 이해한다면
어떤 이유, 특히 사랑의 이유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 때문이었을까요?
제 생각에 티모테오의 부모가 모두 그리스인이었으면
바오로 사도가 티모테오에게 굳이 할례를 베풀지는 않았을 겁니다.
다시 말해서 티모테오의 경우는
이방인에게 억지로 할례를 베푸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 반대의 경우일 수 있지요.
이는 마치 아버지의 반대 때문에 하느님의 길을 가지 못했던 프란치스코가
아버지 소유는 옷까지 다 돌려드림으로써 자유롭게 성소의 길을 간 것처럼
디모테오에게 있어서 할례는 단순히 한 종교예식을 거행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인 아버지의 반대로 하느님의 길을 가지 못하던 티모테오를
아버지로부터 해방시키는 사건이요, 자유롭게 성소의 길을 가게 하는 사건,
곧 삶의 전기(Turning point)가 되게 하는 사건이었을 겁니다.
선교 차원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이스라엘에서 박해를 받고 이교지역으로 퍼져나가지만
바오로와 협력자들이 처음 찾아가는 것은 이방인이 아니라 유다인이었지요.
그러니 유다인들에게 찾아갔을 때 거부감을 갖게 하지 않는 것은 중요했고,
그래서 디모테오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했을 것입니다.
이는 제가 러시아나 중국에 선교를 시작할 때
고려인과 조선족을 먼저 찾아간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제가 러시아를 처음 찾아갈 때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저도 러시아어를 못하고, 그들도 한국말이나 영어를 못했지요.
우스리스크라는 도시에 처음 들어갔을 때 허허벌판에 선 듯 막막했고,
그래서 그저 시장을 돌아다니며 고려인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 찾는데
시장 한 군데에 <개고기>라고 한국말로 쓰인 작은 간판이 보였습니다.
구세주를 만난 듯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고 아무튼 그 고려인들을 통해
러시아 우스리스크에서 저희 수도회의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다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 때문에 복음을 들고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찾아가고,
사랑 때문에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도록 그들에게 나를 맞추고,
사랑 때문에 나를 낮추고, 나를 꺾고, 그들에게 나를 맞춥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아이에게 무릎을 끌고,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아이처럼 되는 것처럼
바오로와 티모테오는 복음 때문에, 사랑 때문에 선교하러 가고
선교를 더 잘 하기 위해 유다인을 찾아가고, 할례를 받은 겁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오늘 무엇을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