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뽑은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제자들을 뽑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유다 이스카리옷을 대신해서 사도가 된 마티아도
사도들의 제비뽑기로 뽑혔지만 실은 주님께서 뽑으신 사도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생깁니다.
정말 주님이 뽑으신 것인가?
주님이 뽑으셨다면 왜 유다 이스카리옷과 같은 사람을 뽑으신 것일까?
주님이 잘못 뽑으셨다는 말인가?
잘못 뽑으신 것이라기보다는 아예 주님께서 뽑으신 것이 아니고,
오히려 유다가 주님을 선택했다가 주님을 차버린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들과 의문들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유다 이스카리옷이든 마티아든 다 당신이 뽑으신 거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생각을 깊이 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유다나 마티아를 뽑은 것이기도 하지만
12 사도를 뽑으신 거고, 12 사도 중 하나로 그들을 뽑으신 거라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저희 관구의 평의회는 6명으로 구성되고,
재속 프란치스코 회 평의회는 10명으로 구성되는데
누가 되든 6명 또는 10명을 뽑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평의원 역할을 잘할 것이라 믿고, 또 잘 해주기를 바라며
6명 또는 10명을 뽑았는데 어떤 사람은 끝까지 역할을 잘 하지만
어떤 사람은 잘못하기도 하고 그래서 중간에 그만 두기도 하지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을 뽑으신 것이 아니라
완전을 이루도록 사람을 뽑으신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12명이 되어야 완전해지기에 유다를 뽑으신 것이고
유다의 자리가 비었을 때 마티아도 뽑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또 다른 말로 하면 완전한 사람을 뽑으신 것이 아니라
사도단, 공동체가 완전하도록 유다와 마티아를 뽑으신 것인데
유다는 공동체에서 떨어져나가고 마티아는 남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유다는 떠나고 마티아는 남았을까요?
한 마디로 얘기하면 마티아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는 말씀대로
주님 사랑에 머물렀던 반면 유다는 주님 사랑에 머물지 않았던 거지요.
실상 우리도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 사랑 안에 머물지 않습니다.
세상 욕심 때문에 주님 사랑 안에 머물지 않고 근심 가운데 살고,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느냐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기도 안에 머물지 않고 걱정 가운데 삽니다.
그리고 설사 우리가 기도를 한다 하더라도 세상 욕심에 끌려서 하면
그 기도는 주님 사랑 안에 그저 머무는 기도가 아니라
욕심을 채워달라고 보채는 기도일 뿐이기에 기도하면서도 불안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주님 사랑 안에 머물지 않기에
은총 안에 머물지 않고 고통 가운데 삽니다.
이는 마치 햇빛을 피해 어둠 가운데 있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고통을 은총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서 은총을 보지 못하고 고통에만 머뭅니다.
아니 반대로 얘기해야 할 것입니다.
고통 안에만 머물기에 거기서 은총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사랑 안에 머문다면
지나고 난 뒤에야 돌아보니 모든 것이 다 은총이었다고 하지 말고
고통 가운데서도 은총을 현재적으로 누리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