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어렸을 때나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때는 열등감이 참 많았습니다.
키나 얼굴과 같은 용모적인 열등감에서부터
성격이나 대인 관계 면에서의 열등감까지
그 열등감은 다양하기도 했고 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열등감이 전혀 없는 것 아니지만
그리 많거나 크다고 할 수는 없는데
새로 생긴 것인지 전에부터 있던 것인지 모르지만
대신 다른 열등감, 말하자면 영적인 열등감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열등감의 이면에는 부러움이 있기 마련이듯
어떻게 보면 제게는 열등감보다 부러움이 더 큰 것인 듯하여
오늘 새벽에는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그 자리에서 눈감고
나는 무엇이 부럽고, 무엇이 부족하고 필요한 거며, 그래서
성령의 어떤 은사를 청해야 하는 건지 내면성찰을 해봤습니다.
그랬더니 성령께서 내게 오시면
내게 부족한 것을 나보다 더 잘 아시고 어련히 채워주실 것이기에
내가 무엇이 부족하니 주십사고 청할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와 동시에 더 근본적인 문제는 다른 데 있다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것은 제가 부활시기 내내 사도행전에서 성령에 사로잡힌 사도들,
특히 바오로 사도를 묵상하며 내게도 성령이 임하시기를 바랐고 그래서
“오소서, 성령님!”을 자주 화살기도로 바쳤는데
이런 태도가 아주 잘못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안이하고 진지하지 않은 자세였습니다.
이를테면 절실함과 진지함이 부족한 상태에서 오실 테면 오시라는,
오늘 복음에 비추어보면 주님과 진지하게 대면하지 않는 자세였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성령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인데
저는 주님 앞에 있지도 않고 주님께 주십사고 청하지 않으며
그저 성령께서 알아서 오시라는 그런 식이었습니다.
실로 저는 지금까지 주님 앞에 있지 않았고
주님을 향하여 있지도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향하여 있었습니다.
주님이 언제나 내 언저리에 계시긴 하는데
뒤에 계시거나 옆에 어디 계시기에
의식은 하면서도 정면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시며 성령을 주시듯
주님의 숨을 들이키려면 나의 코가 주님의 입 앞에 있어야 하는데
나는 주님을 의식만 하며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나는 소명을 받는 이사야처럼 주님 앞에서 놀라 외쳤어야만 했습니다.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주님 앞에 내가 서기만하면 되는 거였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이사야 입을 숯불로 정화하시듯
주님께서 당신 숨을 내 코에 불어넣어주시고 성령을 주실 거였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성령께서 하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나를 정화하시고,
성령께서 나를 두려움 없게 하시고,
성령께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다시 시작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다시 시작으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지금 내겐 성령의 새로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