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엉뚱하게 용서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령을 이야기 할 때
교회는 보통 7가지 은사나
9가지 열매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그 16가지 안에 용서라는 단어는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성령과 함께 용서를 말씀하시는 것이
한편으로는 엉뚱하게 느껴집니다.
오늘의 두 독서는 다름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들은
성령을 받은 후 각기 다른 언어로 이야기 합니다.
코린토 1서에서 바오로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 직분이 다르고,
누구는 유다인이고 누구는 그리스인이며,
누구는 종이고 누구는 자유인으로
서로 같지 않음을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이 두 독서는 다름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또한 일치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각기 다른 언어로 사도들이 이야기 하는 그 내용은
똑같은 것, 즉 하느님의 위업을 똑같이 말하고 있음을
사도행전은 전하고 있습니다.
코린토 1서에서 바오로는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그 은사를 주시는 성령은 같은 성령으로,
한 성령 안에서 모든 이들이 한 몸이 됨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오늘의 두 독서는 다름과 일치를
동시에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치를 이야기 할 때
같음을 이야기 하지 다름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좀 더 나아가자면 우리는 획일화를 이야기 합니다.
그 상황에서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다릅니다.
같지 않습니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 다릅니다.
획일화를 이야기하면
누군가는, 특히 약자들은 고통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는 고통 받고,
누군가만 행복한 일치는
거짓 일치입니다.
그렇기에 다름을 인정하면서
일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용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나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그렇게 스스로의 잘못을 용서해 줄 수 있을 때,
다른 사람의 약함을 인정하고,
그들의 잘못을 용서해 줄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
서로 주고 받는 상처들을 용서해 줄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가 서로 다름에 대해서 인정할 수 있고,
그렇게 한 발씩 물러나서
일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의 노력만으로 그 용서는 쉽지 않습니다.
나 자신의 약함과 상대방의 약함을
내 힘만으로는 인정해 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령께 청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여정에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도와 주시도록 청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용서를 통해서 너희는 참 평화 속에 머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