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오늘 복음을 읽으니
작년 중국에 가 내몽고 지역의 신자들을 만났을 때가 생각납니다.
그분들은 정치상황 때문에 아주 어렵게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입니다.
말하자면 신앙 때문에 많은 불이익, 희생을 감수하며 사는 분들이고,
우리처럼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지 못함은 물론
영성강의니 피정이니 교육이니 이런 혜택들을 못 누리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이분들의 신앙은 아주 뜨겁습니다.
아니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이분들의 신앙은 아주 뜨거웠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그 추위와 그 더위와 그 먼 거리를 무릅쓰고
성당에 더 뜨거운 마음으로 가고
신부님을 열렬하게 모셨던 것과 같은 거였습니다.
만남을 마치고 생각 없이 헤어지려고 하니 강복해주기를 청하는 거였고,
강복을 주려고 하니 땅바닥 더러운 것 개의치 않고 즉시 무릎을 꿇더니
저의 옷을 그들이 꽉 쥐어 잡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움찔!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여인,
예,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의 그 자세였고, 그 행동이었습니다.
요즘 한국교회에서는 사제를 아주 우습게 생각하는 신자들이 늘어나지요.
그 탓이 누구에게 있건 간에 그 손해는 신자들에게 돌아갑니다.
사제를 통해서 하느님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고,
사제를 통해서 치유와 구원이 신자들에게 발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봐서 또 들어서 아시고 계시지요.
옛날에는 사제가 먹고 남은 밥을 먹으면 명오가 열린다고 해서
일부러 밥을 많이 담아 남게 한 다음 한 숟가락씩 나눠먹은 것 말입니다.
사제가 먹은 밥이어서가 아니라
사제가 강복한 밥이기에 거기에 하느님의 복이 있다고 믿은 거였잖아요?
이런 믿음에서 성사Sacramentum가 발생하고
하느님의 구원과 복이 발생하는 것이지요.
갈수록 제가 느끼는 것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준다는 느낌입니다.
요즘 성전 안에서 인사하고 크게 떠들고 마시는 거 다반사입니다.
밖에서 할 수 있는데도 굳이 성전 안에서 그리 함으로
성전이 하느님을 만나는 특전적인 장소가 되지 못하고,
그저 인간들의 친교, 심하게 말하면 사교 장소가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하느님 안에서 형제와 인사를 나누고 친교를 나눈다면
그것 또한 성사이니 나무랄 게 아니라 권장해야 할 거지만
그런 것이 아니기에 문제라고 하는 것이지요.
사제를 존경하면 존경받는 사제가 좋은 것이 아니라
존경하는 신자에게 하느님이 발생하기에 좋은 것이고,
사제를 믿으면 신뢰를 받는 사제가 좋은 것이 아니라
믿는 신자의 신앙이 성장하고, 하느님이 발생하기에 좋은 거지요.
왜 요즘 우리에게 거룩한 것이 발생하지 않고,
하느님과 하느님의 구원과 하느님의 복이 발생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의 옷자락도 믿어 구원이 발생하는데
어떤 사람은 주님의 사제도 믿지 않아 구원이 발생치 않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는 거듭되는 주님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오늘은 이런 관점에서 한 번 묵상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