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깨달았는지를 물으시는데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니까 그물과 고기의 비유만을 깨달았는지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13장에서 드신 모든 비유들의 뜻을 다 깨달았냐고 물으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단지 그물과 고기의 비유에 국한되지 않고,
아예 깨달음 자체에 대해서 묵상을 나눠보겠습니다.
깨달음은 지금까지 모르던 것을 이제 알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단순히 모르던 것 지식 하나를 더 알게 된 것이 아니라
모르고 있던 내가 알게 된 것 그 자체를 말하는 겁니다.
‘아, 그것을 몰랐네.’가 아니라 ‘그것을 내가 몰랐네.’라고 하는 것이며
내가 모르고 있었음을 알게 된 것이고, 모르고 있는 나임을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기본적으로 과거적 깨달음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모르고 있었고,
그래서 어리석었으며,
그래서 잘 못 살았음을 깨닫는 것이고,
그래서 깨달은 사람은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고 토로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어리석음일까요?
그것은 정작 알아야 할 것은 모르고 쓸 데 없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며,
더 중요한 것은 모르고 덜 중요한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고,
그래서 중요한 것은 놓치고 쓸 데 없는 짓만 했다는 것입니다.
가장 흔한 깨달음이 돈이 그리 중요한 것 아닌데 돈이 가장 중요한 줄 알고
건강도 잃고, 가정도 잃고, 형제도 잃고 친구도 잃었음을 깨닫는 것이지요.
그래서 대부분의 과거적 깨달음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다 잃고 난 뒤에야 오는, 상실의 깨달음입니다.
그런데 깨달음이 과거적 깨달음, 상실(잃음)의 깨달음으로만 그치면
이 깨달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그저 마음만 아픈 깨달음이기에
깨달음은 반드시 미래적 깨달음, 터득(얻음)의 깨달음이어야 합니다.
알아야 할 것을 몰라 어리석었던 사람이
이제 깨달음을 통해 지혜를 터득하게 된 것이고,
그래서 전에는 잘 못 살았었지만 지혜를 터득한 지금부터는
전과 같이 무지몽매無知蒙昧하게 살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어두움 가운데 있던 사림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깨달아 빛 가운데 살게 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어두움 가운데 있을 때
빛이신 주님께 자신의 어두움을 밝혀달라고 청하였는데
우리도 참 빛이신 주님의 조명을 받아야만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이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평생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 하늘나라에 관한 비유를 다 마치신 다음
너희는 다 깨달았느냐고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 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빛이십니다.
이 빛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평생 어둠 가운데 삽니다.
빛이 없으면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보려고 해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빛이 없는 눈들이 되지 말아야 함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