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오늘 복음은 잘 아시다시피
주님 추종에 실패한 부자의 얘기에 이어지는 얘기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했던 부자인데 그 부를 포기 못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단순화하여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 내 앞에 <영원한 생명>과 <부>가 있습니다.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선택할 것 같은데
부자는 왜 부를 선택했고 많은 사람들은 왜 부를 선택하는가?
복음의 부자나 대부분의 우리에게 부는 현재의 것이고,
영원한 생명은 현재가 아닌 미래의 생명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부를 누리며 살다가
죽게 되면 그때 영원한 생명과 하느님을 선택하자고 말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현세를 사는 동안에는
영원한 생명이나 하느님께는 전혀 관심이 없다가
죽을 때 세례를 받고 편리하게랄까 쉽게 구원을 받으려 합니다.
어떻게 보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그러다 보니 나쁜 짓도 많이 하다가
죽기 전에 회개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참으로 약은 것처럼 보이고,
하느님 계명대로 사느라 가난하게 산 사람이 도리어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의하면 영원한 생명은 죽은 다음의 것,
다시 말해서 미래의 것이 아니라 현재의 것입니다.
왜냐면 영원이란 영원한 현재이고, 현재가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를 사는 것입니다.
재물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사람이든 현재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지금은 현재의 것일지 모르지만 영원치 않습니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무상하지 않고 그래서 인생무상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현재를 살지 않고,
영원한 것을 가지고 현재를 사는 것이 영원을 현재로 사는 것이요,
영원한 현재를 사는 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현재를 죽을 때가 되어서야 사는 것보다
지금부터 사는 것이 더 현명하게 삶을 사는 것이고,
더 행복한 삶을 일찍부터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영원한 것입니까?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이 영원하시고,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영원하며,
명예와 권력과 욕망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 묻겠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재물과 명예와 권력과 욕망을 쫓아 살다가
사랑과 진리는 죽고 난 뒤에나 살겠습니까?
아니면 지금부터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를 살겠습니까?
이것이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요, 도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