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요?”
비슷하게 쓰이는 그래서 붙여 같이 쓰기도 하고
서로 혼동하기도 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이고, 보통 시기질투 한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 둘이 상대에 대한 악감정이라는 면에서는 같지만
그 악감정의 내용이 다른 것입니다.
질투가 사랑과 관련한 악감정이라면
시기는 성공과 관련한 악감정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나보다 더 사랑을 받으면 그를 질투하고,
누가 나보다 더 성공을 하면 그를 시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가 비교적 더 질투를 하는 반면
남자는 비교적 시기를 더 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질투는 사랑을 누가 더 받느냐의 문제이기에
반드시 누구의 사랑을 놓고 경쟁을 하고 질투를 하는 거지만
시기는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프듯이 그저 경쟁자가 잘 되면 싫은 겁니다.
그런데 만약 요셉의 형제들 경우처럼 아버지가 요셉을 편애하고
그래서 아버지가 요셉에게만 땅을 사준 것이면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서는 질투를 하고
형들이 못 가진 땅을 동생이 갖게 된 것에 대해서는 시기를 하게 되지요.
이처럼 시기와 질투는 경쟁자와의 관계에서 생기는 악감정입니다.
예를 들어 어린이가 모든 사랑을 받으면 누구도 질투하지 않고,
만약 질투한다면 질투하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지요.
그런데 어쩌면 시기는 질투보다 더 경쟁적인 것입니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르 관계처럼 경쟁자가 잘 되는 것이 내게는 악이기에
그가 잘 되는 것이 싫기에 잘못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가 잘못 되도록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합니다.
그러니 어떤 후궁이 왕의 굄을 받아서 아이까지 왕세자가 되면
아이를 못 낳아 굄도 받지 못하고 왕세자도 없는 왕비나
다른 후궁들의 시기와 질투는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토록 경쟁의 관계에서는 남의 행복이 나의 불행이 되고,
경쟁자가 잘 되게 해주는 것은 나를 못되게 하는 것이며
경쟁자에게 해주는 선은 내게는 악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비유에서 하느님이 나 아닌 남에게 은총을 베푸신 것은
그가 경쟁자일 경우 내게는 악이 되고 그래서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는 개신교 번역은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더 친절하게 풀이하면 이런 뜻이 되는 거지요.
내가 네 경쟁자에게 선한 것이 너에게는 악이 된다고 보느냐는 뜻이지요.
우리는 그래서 불행합니다.
나도 충분히 하느님 사랑을 받고,
하느님께서 내게 많은 것을 주셨어도 불행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에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데도 불행하고,
특히 치열한 경쟁으로 모든 사람을 내모는 이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소수만 행복하고 대부분, 아니 모두가 불행합니다.
카인과 아벨에서 시작된 에덴 동쪽의 그 불행을 우리는 끊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의 비유는 우리에게 이 질문을 던지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