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베드로의 배에 오르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베드로와 첫 번째 제자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얘기는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이 전혀 다르고,
공관복음 중에서 오늘의 루카복음은 다른 두 복음과 꽤 다릅니다.
왜 이렇게 중요한 사건, 동일한 사건을 다르게 기술하였는지,
어떤 것이 역사적 사실에 합당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복음사가들의 의도는 우리가 알 수 있고, 또 알아야 합니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의 부르심 받는 얘기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너무도 간단하여 주님의 부르심에 제자들이 군소리 없이 따랐다는 얘깁니다.
여기서 전후좌우의 얘기를 생략한 복음사가들의 의도는
하느님 부르심의 절대성과 우리의 따름의 즉각성이지만
이것이 누구에게는 너무 성의 없는 부르심처럼 오해를 살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이방인들을 위해 쓰인 루카복음은
이 얘기에 살을 붙여야 할 필요성이 있었고,
앞에 다른 사건도 배치해야 할 필요성도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에서는 부르심 받은 다음에 있는 얘기들,
곧 시몬의 장모의 열병이 치유 받는 얘기와 악령 추방 얘기를
루카복음사가는 부르심 받는 얘기 앞에 배치하였고,
부르심 받는 상황도 공을 들여 정교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우선 지나가다가 부르시지 않고 주님께서 다가가서 부르십니다.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베드로 곁에서 말씀을 선포하시다가
고기잡이를 끝내고 정박해 있는 두 개의 배들 중에서
베드로의 배를 선택하여 오르십니다.
그물 손질하고 있는 베드로 곁에서 말씀을 선포하신 것이나
두 배 중에서 베드로의 배에 오르신 것이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거칠게 표현하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수작을 부리신 것이고,
좋게 의미를 부여하면 예수님께서 공을 들여 베드로에게 다가가신 것입니다.
아니 그 전날 시몬의 장모의 집에 가시고 병을 고쳐주신 것이나
악령을 쫓아내는 기적을 행하신 것도 다 베드로를 부르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셨으면 밤새 애써 한 마리도 못 잡은 그 바다 한 가운데를
베드로가 다시 나갈 리도 없고 그물을 다시 내릴 리도 없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초보자라면 모를까 갈릴래아에서 그물질로 몇 십 년을 먹고 산 베드로가
어찌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예수라는 청년의 말을 듣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한 사람을 부르시기 위해 그렇게 공을 들이십니다.
주님께서는 한 사람을 부르시기 위해 수십 년 공을 들이십니다.
주님께서는 한 사람을 부르시기 위해 많은 사람을 활용하십니다.
주님께서는 한 사람을 부르시기 위해 수많은 사건을 체험케 하십니다.
수많은 사건과 체험 중에는 성공체험도 있지만 실패의 체험이 있으며
실패를 체험케 하신 것도 성공을 체험케 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은총이며 오히려 실패를 체험케 하신 것이 더 결정적인 은총입니다.
은총을 체험한 사람, 부르심의 은총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듯이
부르심의 가장 막바지에 가장 큰 어둠, 일생 최대의 실패,
오늘 베드로의 경우처럼 온갖 노력이 허사가 되는 체험을 하게 하십니다.
베드로가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다는 것의 의미는
그것이 고작 하룻밤이 아니고 일생이라는 얘기며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는 것은 일생 그런 실패가 있을 수 없는
그런 실패를 하였다는 얘기입니다.
하느님의 개입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라면
어떻게 한 마리도 잡지 못합니까?
아무리 안 잡혀도 몇 마리라도 건지는 것이 보통이지요.
그러므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한 마리도 못 잡은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만 그러시겠습니까?
우리도 그렇게 공을 들여 부르시고, 우리는 그렇다고 믿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믿지 않으면 주님께서는 공을 더 들여야 하시겠지요.
사실 우리보다 더 많이 실패하시고
가장 많이 실패하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그렇게 공을 들여 부르셔도 응답치 않는 성소자가 많고,
응답을 하였다가도 포기하는 성소자가 많으니 말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배에는 오르지 않으셨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