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평화를 빕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시어 죽은 이를 살리십니다. 그는 과부의 외아들이었습니다.
어제 복음에서는 노예가 병들어 죽게 된 백인대장이 유다인의 원로들을 보내어 자기 노예를 살려 주십사고 청합니다. ‘간곡히 청했다’는 구절도 나옵니다. 무엇보다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 노예를 건강한 몸이 되게 하시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 어디에서도 그 과부나 주변 사람들, 제자들이나 예수님을 따라온 많은 군중까지도 예수님께 별다른 청을 하지 않습니다. 과부나 그 주변 사람들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지 못해서 그분이 누구이신지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먼저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마라.”고 이르시고는, 그 외아들을 살려주셨다는 점입니다.
과부와 외아들, 세상에 단 둘만 남겨진 가족입니다. 외아들마저 잃게 된다면, 그 과부는 혈혈단신으로 남겨진 삶을 살아가기가 암담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정을 모두 알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와 외아들의 처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조금 다른 부분에 집중해 보았습니다. 이 복음에 등장하는 고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하고, 죽은 외아들을 살린 예수님을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우는 이들을 버려두지 말고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슬퍼하여라.”라는 집회서의 말씀처럼 어렵고 힘든 이들과 함께 하고, 하느님을 경외하고 찬양하는 그 고을 사람들의 모습이 요즈음 우리 사회에 필요한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월호 진상 규명 문제나 사드 배치, 백남기 임마누엘 농민,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 등 주변의 많은 일들을 접하면서 익숙하지 않았던 ‘연대’라는 낱말이 요즘처럼 우리에게 자주 들리는 때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기 이전에, 우선은 내 옆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과 먼저 만나고 얼굴을 볼 시간을 가져야겠지요. ‘주변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나로부터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 요즈음 사회를 ‘만남이 없는 사회’라 했습니다. 대화보다는 이메일, 메신저, 손전화 등 만나지 않고 얼굴을 보지 않고도 소통할 수 있으니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수단들이 감정까지 고스란히 충만하게 전달되는 진정한 소통이라 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형제들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컴퓨터 모니터를 더 많이 보고, 제 방에 홀로 있는 시간이 더 많은 게 사실입니다. 다시 한 번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고을 사람들처럼 내 곁에 가까이 있는 형제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갖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