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역시 루카복음입니다.
다른 복음에는 없고 루카복음에만 있는 얘기들은
하나같이 예수님께서 죄인들,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을
어떻게 생각하시고, 대하시고, 사랑해주셨는지에 대한 얘기입니다.
저희 수도회 일본 관구 소속의 형제 중의 한 분은
성서학자인데 노숙자들 가운데서 살며 동고동락합니다.
제가 그분 머무는 곳을 방문하니 1, 2층은 노숙자들의 쉼터이고
그 위 3층에 몸 하나 뉘이면 그만인 조그만 방이 그분의 방인데
방의 집기라곤 냄비 하나와 이동식 난로와 컴퓨터뿐이었습니다.
이 형제는 낮에는 노숙자들과 같이 부대끼고 나머지 시간을 이용하여
자기의 전공인 성서 연구를 하는데 십 수 년 간 계속해서
가난한 이들의 눈으로 성서를 풀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렇게 살지 못하는 저를 부끄럽게 하는 형제였지요.
루카복음도 이런 시각으로 쓰였고 오늘 복음도 그 중 하나로서
짧지만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성들에 대한 얘기가 이렇게 짧게 취급되는 것을 보고
혹자는 오늘날 여성주의적인 관점에서
여성의 역할이 너무 적고 작게 다뤄졌다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여성들의 역할이 무시되던 당시로 보면 이 작은 기록만으로도
가히 혁명적이었다고 학자들은 얘기합니다.
그런데 루카복음의 기록도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남자와 여자가 공적으로는 상종조차 않던 그 당시로 보면
예수님께서 여성들을 물리치지 않고 받아들이신 것은 더 혁명적이고
당시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여인들이 예수님을 따른 것은
더더욱 혁명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따른 것은 개화기 우리나라 신여성처럼
우리도 남자들처럼 뭔가 이루고 남기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제자들처럼 자기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도 아니고
자기들이 받은 소명이나 일을 완수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그저 그리고 순전히 예수님을 시중들기 위해서입니다.
남자 제자들, 사도들은 예수님을 통해 자기 성취를 하려고 했기에
예수님께서 힘없이 돌아가시게 됐을 때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지만
이들 여 제자들은 예수님 자신을 따랐기에 끝까지 같이 있었지요.
이 여인들이 바랐던 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사랑했기에 예수님 가까이 있을 수 있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사랑했기에 예수님 뒷바라지 할 수 있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이 여인들은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이 여인들은 오늘 우리를 성찰케 합니다.
바라는 것 얻을 수 없겠다고 생각되면 주님을 멀리하고,
청하는 것 들어주시지 않으면 주님을 떠나버리는 내가 아닌지.
그리고 이 여인들은 프란치스코의 다음 권고를 상기케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참되시고 으뜸 선이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원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말며,
다른 아무 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맙시다.”
하느님 자신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