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약은 집사의 비유로 시작되는데
주님께서 이 비유를 들려주심은 우리 모두 하느님의 집사로서
주인이신 하느님께는 충성스럽고, 맡기신 일에는 충실하라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어떻습니까?
저나 여러분이나 ‘나는 하느님의 집사다.’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저는 종종 개신교를 보며 이것은 개신교처럼 하면 좋겠다는 것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집사라는 직책과 호칭입니다.
지금 우리 가톨릭이 서로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주 좋으나
반장님, 구역장님 하고 부르는 것은 복음적이지 않은 호칭인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 집사가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듯 더 복음적인 호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의 공식적인 호칭이 무엇이건 우리는
우리가 집사라는 정체의식을 가져야 하고, 그에 맞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집사의 정체성에 맞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첫 번째로 집사란 본래 주인의 재산 관리인이니 주인이신
하느님의 재물을 하느님의 뜻에 맞게 잘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뜻은 죽으나 사나 사랑하라는 것이고,
당신의 재물을 가지고 우리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 재물을 가지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재물을 가지고 우리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재물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치 못하는 것은
하느님의 재물을 내 것으로 착복하기 때문이거나
하느님의 재물이 아닌 자기 재물로 사랑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의 경우 본래 제가 돈을 벌지 않고 선의의 분들을 대신하여
사랑을 실천하기에 제가 제 것으로 사랑을 실천한다고 생각지도 않고
그래서 좋은 일이라고 생각되면 주저함이 없지만
제가 자주 잘못하는 것은 불성실하게 하느님 재물을 관리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것을 제가 움켜쥐고 있거나 착복하지는 않지만
제가 고생해서 번 돈이 아니기 때문인지 하느님의 재물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사랑이 더 잘 전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면에서는 너무도 불성실한 집사입니다.
그래서 저의 경우는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는 말씀이 뼈저립니다.
여기서 작은일, 큰일은 세상일과 하느님의 일을 일컫는 거라고 할 수 있는데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 저와 같이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이든 남이든 영혼구원이라는 큰일 앞에서 먹고사는 것과 같은 세상사는
결코 큰일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되겠지요.
하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결코 작은 사랑, 큰 사랑이 있을 수 없고,
하느님의 일에도 큰일, 작은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수만 명을 살리는 것은 큰일, 큰사랑이기에 열심히 하고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며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아흔아홉을 두고 한 마리 잃은 양을 찾는 주님의 사랑에 어긋나지요.
집사인 우리에게는 재능이든 재물이든 다 내 것이 아닙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달란트는 주인이 맡긴 것이지요.
그러므로 집사인 우리가 재능도 그렇고 재물도 내 것으로 소유하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서만 쓴다면 그것은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자기소유의 차원에서는 돈이 똥과 같은 것이지만
이웃사랑의 차원에서는 돈이 사랑과 진배없기에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집사라면 하느님의 재물을
잘 그리고 성실히 다루라는 오늘 말씀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