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옛날에 야학을 할 때 <등불>이라는 노래를 자주 부르곤 했는데,
특히 졸업식을 할 때면 교가 대신 부르곤 하였지요.
그러니까 이 노래를 교가처럼 부르는 것은 지금은 집안사정이 어려워
비록 정식교육을 받지 못하고 야학을 통해서 교육을 받지만 언젠가는
이 사회를 비추는 등불이 되겠다는 의지와 바람의 표출인 것이지요.
사실 그들의 현실은 어려움이 많았고 미래는 어둠이었지만 그럼에도
자기의 어둠 가운데 묻혀있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 되겠다는
그런 대단한 꿈과 의지를 그들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왜 이런 얘기를 하는가 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등불이 되라고 하시는데
요즘 사람들 중에는 자기가 등불이라는 자의식도 없고
등불이 되려는 자기의지도 없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자기의지와 자의식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저희 형제들을 양성하는 소임을 맡았었고,
지금도 양성소에 있기에 양성에 협조를 하고 있습니다.
양성이란 인간적, 그리스도교적, 프란치스칸적 성숙을 돕는 것인데
형제들 가운데는 자기가 이미 어른이라는 자의식도 없고
성숙한 사람이 되려는 의지도 없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너는 여러모로 미성숙하다고 하면 기분 나빠하고
어린애 취급을 하면 왜 어린애 취급하느냐고 따지면서도
실제로는 어린애로 머물려 하고 어른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면 왜 어린애로 머물려 하고 왜 어른이 되려 하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어른이 되면 뭐든지 자기 스스로 책임지고 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경제적으로만 봐도 돈 벌어 자기도 먹고 애들도 먹여야 하고,
공동체적으로 보면 주어지는 책임을 스스로 해낼 수 있어야 하며,
인간관계도 남 탓하지 않고 자기가 원만하게 끌어가야 하는데
한 마디로 이렇게 어른 노릇하기 힘드니 어른 되기 싫은 것이고
싫으니 할 수 없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숙에 대한 자기의지와 자의식이 포기되는데
이것은 등불에 대한 자기의지와 자의식도 똑같습니다.
내가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가 세상을 어둡게 하는 장막이 되기보다 등불이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세상을 비추는 등불도 아니고, 등불이 되고 싶지도 않는 것은
등불이 되면 나를 태워야 하는데 나를 태울만한 기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 말이지요.
사랑이라는 기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내가 세상의 등불이 되어야겠습니까? 사랑이 없는데.
그렇습니다. 등잔은 있는데 등잔의 기름이 없으면
신랑을 맞으러 나갈 수도 없고 세상을 비출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비추는 등불은 세상을 살아가는 내 발의 등불이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등불을 켜면 너의 발만 비추겠습니까? 나의 발도 비추지.
이런 얘기가 있지요.
어스름한 저녁 어떤 사람이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등불을 켜고 오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맹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던 사람이 하도 이상해서
당신은 등불을 켜봤자 볼 수 없는데 왜 등불을 켜고 다니느냐고 물으니
바로 당신의 어둠을 밝혀주려고 켜고 다니는 거라고 답하더랍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이 나의 발도 비추고 너의 발도 비추는 등불입니다.
“당신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 나의 길을 비추는 빛이옵니다.”(시편 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