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되물으시고,
바리사이가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옳게 답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옳게 대답했다.’는 말은
‘네가 제대로 알고 답을 잘했다.’는 말의 준말이지요.
그러니 ‘그렇게 하라’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도
잘 알고 있으니 이제 아는 대로 실천을 하라는 말씀인 것이고,
잘 알고 있으면 실천하면 될 일이지 묻기는 왜 묻느냐는 질책이지요.
실로 오늘 주님은 그렇게 하라는 말씀을 두 번이나 하십니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아는 것과 실천>
우리는 실제로 아는 것을 그대로 실천하는가?
우리의 실제 삶은 진리를 실천하지 않고 좋아하는 것을 실천합니다.
이것을 풀이해서 얘기하면 옳다고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기보다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얘기가 되고,
또 달리 말하면 욕망대로 하지 진리대로 하지 않는다는 애기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와 정의에 맞는 것인지 알아도
결국 욕망대로 하게 하는 것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우리의 미성숙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중독증입니다.
예를 들어 술이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뿐 아니라
술을 먹으면 실수를 그렇게 많이 하는데도
먹고 싶은 욕망을 어쩌지 못하여 먹는다면
그것은 중독증이거나 적어도 미성숙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실제를 보면 욕망대로 하는 미성숙이
성숙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래 지속이 되면
그것이 결국에는 욕망 중독증이 되는데
이 욕망 중독증이 우리의 육신 건강이나 정신 건강 뿐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견강마저 무너뜨려 영적인 삶마저 불가능하게 합니다.
이런 욕망 중독증 앞에선 진리와 정의에 대한 말은 무력화되고,
오늘 복음에서 얘기하는 영원한 생명이니 사랑이니 하는 것도
아무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하고 마는데, 이 말은 윤리도덕이나
초월적 가치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신자유의가 우리를 그렇게 만듭니다.
제가 요즘 강의하러 다니며 수없이 얘기하듯이
과거에는 종교를 믿건 안 믿건 욕망을 죄악시하고 적어도 절제케 하였는데
요즘 신자유주의는 이 욕망을 정당화하고 욕망대로 살라고 부추깁니다.
심지어 종교적 금욕주의는 케케묵은 것이고 웃기는 것이라고 비웃고,
인간의 정당한 욕망을 억압함으로서 사람을 왜곡되게 만든다고 하며
오히려 우리가 절대적인 가치를 두어야 할 사랑을 왜곡하게 합니다.
사랑하기보다는 좋아하고,
좋아하는 것을 욕망하고 소유하라고 교묘히 왜곡하는 것이지요.
큰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근본에서부터 무너지고 있고,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이 신자유주의에 쇠뇌 되어
수도원에 들어오려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지요.
그런데 젊은 사람만 걱정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걱정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눈을 부릅뜨고 경계하지 않으면
신제품 좋은 것이 나왔다는 이 신자유주의의 집요한 광고에 쇠뇌 되어
가랑비에 옷 젖듯이 우리도 어느새 욕망 중독증에 걸려 있을지 모름을
깊이 성찰해야 할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