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는 불행하다는 말이 네 번 나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불행하다고 하시는 이유들이
사실은 우리 인간이 행복해하는 이유들입니다.
윗자리에서 인사 받고 대접받을 때 우리는 행복해하고,
내 죄와 잘못 드러나지 않을 때 참 다행이라고 하며,
나는 무거운 짐 안 져도 되고,
다른 사람이 대신 져주는 처지이면 행복하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행복한 것은 그 반대가 될 때 불행하고,
우리 인생은 얼마든지 그렇게 역전될 수 있는 거지요.
요즘 대통령의 비호아래 권력을 농단하던 사람들이
권력의 말기에 가니 그 비리가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런 행복을 행복으로 여기는 불행을 경계하라는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씀들보다 십일조는 잘 바치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을 아랑곳하지 않는 불행에 대해 더 묵상코자 합니다.
왜냐면 인간에게 기대는 인간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불행도 문제지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잘못함으로 인한 불행이 더 문제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십일조를 바치는 것만으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을 퉁 치거나 삭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아무리 십일조 많이 내도 그것이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을 대신할 수 없고,
십일조를 하나도 안 내도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이 있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의로움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고,
하느님 사랑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요 우리를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의로움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으로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보다 우리가 의로워지고
사람들에게 의롭게 하는 것을 더 바라십니다.
이는 모든 부모가 당신에게 뭘 사가지고 오는 것보다
형제들끼리 서로 잘하며 지내는 것을 더 바라시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신에게 올 때는 바리바리 싸가지고 오면서
동생 것 가로채고, 형제들에게 인색한 자식을 좋아할 부모 어디 있겠습니까?
다음으로 주님께선 우리가 하느님 사랑을 아랑곳하기를 바라시는데
여기서 하느님 사랑이 무엇인지 우리는 좀 뜯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옛날 번역과 개신교 성서 그리고 영어 성서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느님께 대한 사랑’ 또는 ‘하느님을 위한 사랑’이라고 번역하는데 비해
지금 우리의 번역은 그저 ‘하느님 사랑’이라고 번역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첫째가는 뜻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 곧 우리의 사랑이겠지만
그 다음으로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뜻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도 필요하고 있어야겠지만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더 필요하고 꼭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느님 사랑 없이 한 시 또는 한 순간인들 살 수 있겠습니까?
햇빛이 잠시 없어도 우리는 당장 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햇빛 없이 우리가 살 수 있다고 얘기할 수는 없는 것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없이는 한 시 또는 한 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하느님 사랑 없어도 되는 것처럼 사는 것은
한 시도 그리고 한 순간도 하느님의 사랑이 없었던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늘 있었기에 부모 살아계실 때는
그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사랑을 찾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돈 없으면 안 되고 하느님의 사랑은 없어도 되는 것처럼 산다면
그것이 진짜 불행한 것임을 우린 오늘 새삼스러운 듯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