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어제 저는 대림 1주 화요일 강론을 올렸지만
실은 어제가 프란치스칸 모든 성인의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얘기 중에 당연히 성인이란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하면 성인이 될 수 있는지 얘기가 형제들 간에 오갔고,
복음이 부자청년의 얘기였기에 ‘가난’, ‘포기’, ‘버림’ 등이 얘기되었지요.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젊은 형제들은 저와 확실히 다르다는 생각을 했고,
저도 한 때는 성인됨의 길이 이런 거라 생각했던 적이 있음을 회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얼마간은 자기성취의 불순물도 있고,
그런 불순물은 없더라도 자기완성의 의미가 농후한 성인됨의 길이지요.
저도 2-30대는 옷이나 돈과 같은 세상 것은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었고,
그렇게 버린 나 자신을 교만이다 싶을 정도로 자랑스러워도 하며,
멋이나 부리고 돈에 욕심 부리는 친구들을 보면 은근히 얕보기도 했었지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런 생각이 바뀌어 지금의 저는
주님을 따름에 성인됨의 길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아무리 자기성취와 완성을 이루었다고 해도
주님을 따라나서지 않는다면 성인이라고 할 수 없고
아무리 성인이 되려고 해도 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전에는 그랬습니다.
초인이 되는 것이 성인이 되는 거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초인되는 것도 싫고 그런 성인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르고 닮으려 하지 않는 초인과 성인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격적이지 않은 초인, 사랑하지 않는 성인은 성인이 아니니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연인일 수 있고, 존경하는 스승일 수도 있습니다.
그를 사랑하고 존경한다면 어찌 따라가거나 닮으려고 하지 않고
나는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초인, 성인이 되겠다고 하겠습니까?
이제 저는 사랑하는 성인인 되지 가난한 성인이 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다면 ‘고독한 초인’이 아니라 ‘따르는 성인’이 되겠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안드레아 사도는 이런 면에서 우리의 모범입니다.
그가 모든 것을 버린 것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My Way(자기의 길)를 가지 않고 주님의 길을 따라 갔습니다.
그리고 자기만 주님의 길을 따라 간 것이 아니고
자기 형과 동료들과 함께 따라 갔고,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였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그는 제일 먼저 주님을 따라갔고,
가서는 주님과 함께 머물었으며,
가서 본 것을 형과 동료들에게 전해주어 같이 따르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주님을 뵈러 왔을 때는
자기 선에서 끊지 않고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주님과의 수직적 인격적인 관계도 잘 맺고
이웃과의 수평적인 인격적인 관계도 잘 맺은 사람입니다.
홀로 자기의 길을 간 것도 아니고,
홀로 주님께만 가지 않았습니다.
형제들과 함께 주님께로 나아간 사도입니다.
개인주의, 고립주의가 만연한 오늘날의 우리는
공동체로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모범을 그에게서 봐야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