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눈 먼 두 사람이 보게 되는 얘기입니다.
대림과 성탄과 연결시켜 오늘 얘기를 이해하면
오신 주님을 알아 뵙게 되는 것인데 보게 되기까지 그 과정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끝부분에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라는 묘사가 있는데
<그러자>가 바로 눈이 열리기까지의 과정에 마침표를 찍는 표현입니다.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렇게 했는데 그러자 눈이 열렸다는 얘기지요.
그러면 눈 먼 두 사람은 어떻게 보게 되었습니까?
어떤 과정을 거쳐서 보게 된 것입니까?
첫 번째는 주님의 자비를 본 것입니다.
그들이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자비를 볼 수 있는 눈은 열려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두 맹인은 주님을 따라가며 이렇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주님께 자비가 있음을 보았기에 쫓아가며 외쳤던 것입니다.
길을 가다보먼 돈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구걸을 하기 위해서는 돈이 있는 사람을 알아봐야 합니다.
돈이 없는 사람을 쫓아가면 괜히 헛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아쉬운 소리 하는 것은 입이 잘 안 떨어지는 것인데
괜히 돈도 없는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렇습니다. 하기 힘든 아쉬운 소리를 하려면
줄 능력이 있는 사람인지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하는데
맹인들은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는 말씀에
“예, 주님”이라고 답하는 것으로 보아 그들에겐 그런 눈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 스승님”하고 답한 것이 아니라 “예, 주님”이라고 답한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의 눈>은 <불신의 눈>이 아닐뿐더러
하느님을 알아 뵙는 <영적인 눈>, 곧 영안靈眼(spiritual eye)인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께 줄 능력, 곧 권능이 있음을 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줄 마음과 줄 의지, 곧 자비가 있음을 볼 수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자비를 베풀어주십사고 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눈이 열리는 것은 고도의 식별교육에 의한 것이 아니고,
겸손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하심下心에 의한 것입니다.
어제 형제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영적식별 교육과정에 대한 얘기도 나누고
영적식별을 중시하는 영신수련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눴는데
어떤 사람이 어떤 영에 이끌려 하는지, 다시 말해서
성령에 이끌려 하는지 악령에 이끌려 하는지 잘 식별할 수 있어야 하지요.
그런데 저의 삶의 경험을 놓고 볼 때 고도의 영적식별교육이나
영신수련과정을 아무리 많이 그리고 잘 받아도 교만하게 되면
악령적인 것은 잘 알아봐도 성령이나 성령적인 것은 잘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것은 교만한 사람이 선을 못보고 악만 보는 것과 통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교만하면 교만할수록 악만 보고
더 교만하면 더 교만할수록 하느님도, 하느님의 선도 볼 수 없습니다.
제가 30대까지만 해도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기도가 나오지 않았고 미사 중에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할 때
그 말이 싫어 나 말고 저사람 불쌍히 여기시라는 식으로 기도했지요.
자비를 베푸시려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시는 겸손하신 주님을
알아 뵙는 눈은 우리가 겸손해져 하심을 가질 때만 열리는 것이니
교만하고 욕심스럽게 수준 높은 영신수련을 많이 받으려 하기보다
이 대림절 더욱 겸손해지는 회개에 우리 마음을 써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