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수도원에 있을 때 거의 늘 수도복을 입고 있습니다.
요즘 많은 형제들이 수도복을 잘 입지 않고 심지어는
저희 수도원 중요행사 때도 입지 않는 형제가 있는데
저는 거의 늘 입고 있으니 청원형제 하나가 어느 날
‘형제님은 왜 늘 그렇게 수도복을 입어요?’하고 묻기도 하고,
다른 형제는 제가 화장실에도 수도복 입고 가는 것을 보고
‘화장실에도 수도복을 입고 가세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수도자가 수도복을 입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입는데
막상 그런 질문을 받고나니 얼마나 그런 생각으로 입고
얼마나 그런 생각으로 살았는지 저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은수자의 옷을 입고 있다가 수도복을 바꿔 입으면서
타우(T) 형태의 수도복을 만들고
수도복을 입을 때마다 십자가를 입는다는 뜻으로 입고는 하였지요.
그리고 저의 선배 백 안젤로 수사님은 그런 마음으로 수도복을 입을 때
꼭 수도복에 친구를 하고 입으셨고 그렇게 일생을 마치시기 위해
일생 입었던 수도복을 마지막 임종의 순간까지 입기를 고집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성 프란치스코나 백 수사님처럼 수도복을 입지 않고
많은 경우 그냥 옷으로 입거나 당연히 입는 것으로 입었기에
십자가를 입지 않고 매 순간 십자가를 선택하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수도복을 입으면서 십자가를 입지 않는 수도자라니!
수도복을 입으면서 십자가를 거부하는 수도자라니!
깨어 수도복을 입는다면 그렇지 않을 것을!
마찬가지로 매일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한 술 더 떠 강론을 매일 올리기까지 합니다.
수도자가 더욱이 사제가 그러는 것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런데 당연한 것이 역시 문제입니다.
오늘 1독서 스바니야서는 이렇게 이스라엘을 꾸짖습니다.
반항하는 도성, 더렵혀진 도성, 억압을 일삼는 도성.
말을 듣지 않고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구나.”
그런데 오늘 복음을 듣고 깊이 뉘우친다면 1독서의 <반항하는 도성>이
비유에 나오는 <작은 아들>, 그러니까 아버지 말씀을 듣고 즉시 ‘예’하지만 이내 잊어버리고 실천 않는 <작은 아들>보다 숫제 낫다고 생각할 겁니다,
왜냐면 <반항하는 도성>이 반항을 한다는 것은 그 말을 여겨들은 것이지만
<작은 아들>이 ‘예’하고 실천치 않는 것은 그 말을 건성으로 들었거나
발톱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반항을 한다는 것은 귀 여겨들은 것이고,
들어보니 그대로 따를 수 없어 반항을 하는 것이지요.
가정 얘기에 빗대어 한 번 생각해봐도 좋을 것입니다.
한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아주 좋지 않습니다.
고분고분하던 아들이 언제부턴가 아버지에게 반항을 합니다.
나도 이제는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고 판단능력도 나름대로 있기에
이제는 더 이상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다른 아들은 어려서나 커서나 반항이라는 것을 하지 않습니다.
반항하는 것을 아예 포기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의 말을
‘또 얘기하네.’하고 일축하거나 더 나쁘게는 아예 귀에 담지를 않는 겁니다.
제 생각에 반항하는 사람은 그래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신중히 듣고 귀여겨듣기에 나중에라도 뉘우치고 실천할 가능성이 있지만
일축하거나 아예 귀에 담지 않는 아들은 실천할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이 지당하신 말씀이지만 노상 듣는 얘기로 흘려버리고,
매일 복음을 읽지만 ‘또 듣는 말씀’으로 여기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