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주님께서 유혹은 받으셨으나 죄는 짓지 않으셨다는 오늘 히브리서 말씀은
우리 보통 인간으로는 참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고
그래서 많은 묵상, 깊이 있는 묵상이 필요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런 의문을 던져 봅니다.
먼저 유혹을 받으셨는데 어떻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으셨을까?
다음으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신데 주님은 죄 지으시면 안 되는 것인가?
우리 인간은 유혹을 받으면 거의 대부분 죄를 짓습니다.
이 말은 유혹을 받을 때마다 매번 죄를 짓는 것은 아니어도
전혀 죄를 짓지 않을 순 없고 성인이라 할지라도 죄를 짓는다는 뜻입니다.
유혹을 받는 인간이란 하느님처럼 완전한 충만의 존재가 아니라
결핍이 있는 존재라는 뜻이고, 결핍이 있기에 욕구가 있는 존재라는 뜻이며
그리고 죄를 짓는다는 것은 이 욕구가 욕망과 욕심으로까지 발전하여
욕망과 욕심을 따라 하느님 뜻에 어긋나는 짓을 하는 거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욕망과 욕심에 따라 하느님 뜻에 어긋나는 짓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유의지로 그 짓을 할 때 죄이지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우리 인간처럼 결핍의 존재이고, 욕구의 존재이기에
그래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시지만 죄를 짓지 않으셨다는 것은
욕구가 욕망이나 욕심으로 발전하지 않았다는 뜻일 뿐 아니라
자유의지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짓은 하지 않으셨다는 뜻이겠지요.
아무렴 주님께서 이런 죄는 짓지 않으셨을 겁니다.
겟세마니에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피땀 흘리신 분이 아닙니까?
이 세상 생명이 죽을지언정 하느님 뜻을 거스르지 않으신 분께서
이 세상 욕망과 욕심이 죽는 것쯤 못하시거나 안 하실 주님이 아니시지요.
그런데 사실은 주님만 그러신 것이 아니고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약하기는 해도 겁먹고 지레 지고 들어가지만 않으면 우리도
욕망과 욕심을 다스릴 수 있고 불순종과 거역의 죄 짓지 않을 수도 있지요.
그래서 우리의 것이라고는 죄와 악습밖에 없고 선은 하나도 없다고 하는
겸손한 성 프란치스코도 권고 10번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람은 육체를 통해서 죄를 짓게 되는데 누구나 그 원수, 즉 육체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지배 아래 넘겨진 그러한 원수를 항상 손아귀
에 집어넣고 그에게서 슬기롭게 자신을 지키는 그러한 종은 복됩니다.
이렇게 하는 한 볼 수 있건 볼 수 없건 그 어떤 원수도 그를 해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지레 지고 들어가지만 않으면 되고,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면 되고,
거기다가 성령의 갑옷까지 두르면 죄를 짓지 않음은 물론
선행을 하고 온갖 덕행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기 위해서는
꼭 죄를 짓지 않으셔야만 되는가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면 이단적인 생각인지 모르지만
죄를 지으셔도 우리의 구원자 되실 수 있으시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죄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하지요.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2코린 5,21)
죄인 아닌 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지.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깨끗이 닦아주시기 위해 기꺼이 걸레가 되시고,
죄인을 구해주시기 위해 오늘 복음에 보듯 죄인들과 어울리시며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시고,
그리고 기꺼이 죄인이 되어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잖아요?
더러운 것이 죄가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