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모든 축일의 기념이 그러하듯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기념하는 것도 바오로 사도를 위한 것이 아니고
축일을 지내는 우리를 위한, 특히 나를 위한 것이고 그런 것이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회심했다면 나도 회심하는 축일이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먼저 나는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곧 주님이 누구신지 묻지 않는 사람에서 묻는 사람으로,
다른 누구에 대해서가 아니라 주님에 대해서 묻는 사람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이 누구신지 몰랐던 모양입니다.
아니, 어쩌면 하느님은 열심히 믿었지만 자기의 주님이 누구신지
몰랐었을 수도 있고 그래서 나의 주님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이 나의 주님이라는 현존체험이 없었을 수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이라는 임마누엘 체험이 없었을 겁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느님 현존체험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임마누엘 하느님 체험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나의 하느님이 아닌 객관적인 하느님은 얼마든지 믿지만
그 하느님이 나의 주님이 아닌 분으로서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지만 나와 상관없이 계시고
‘지금, 여기’ 나와 함께 또는 내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계시긴 하겠지만 어떤 분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며칠 전 눈이 오는 것을 보다가 이런 묵상을 하였습니다.
눈이 바람에 날리다가 나무에 앉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나비가 꽃에 앉아야지’하는 생각을 했고
나는 나비가 앉지 않는 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눈이 오는 것을 창밖으로 봤지 나가 눈을 맞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은 나가 눈을 쓸기도 하고 만지기도 하였는데
저는 방 안에서 눈이 아름답네 하며 내다보고는 있었지만
도무지 눈을 맞으러 밖에 나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해야 할 일이 있었고 그것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눈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셔도 저는 나가 맞지 않고
하느님이 나비처럼 저를 찾아오셔도 일이나 하는 사람인 겁니다.
나를 찾아오신 주님 그래서 내가 맞이한 주님이
임마누엘 주님이시고 나의 주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누구십니까?”라는 물음은
‘이제 나의 주님이 되신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는 것이고,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예수다.”라는 대답을 듣고
이제 자기의 주님이 누구신지 비로소 확실히 알게 된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뭘 해야 할지 주님께 여쭙는 사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많은 경우 여쭙지 않고 뭘 하는 사람입니다.
뭘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자기 혼자의 생각과 계획대로 하고,
주님과 함께 하더라도 주님께 여쭙기 보다는 주님께 명령을 하곤 합니다.
‘주님 제가 이것을 이렇게 하려고 하오니 들어주소서.’ 뭐 이런 식입니다.
매우 정중하게 기도하지만 사실은
주님의 일을 제가 종으로서 잘 수행하게 해달라고 청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이 내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 선교주인 형제와 선교를 지망 형제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선교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저와 다르다고 생각했고
자기가 좋아하는 선교를 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아침 묵상을 하다 보니 ‘레오나르도, 너는 지금 네가 추진하는 선교가
나의 선교니, 네가 생각하는 선교니?’하고 물으시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는 여쭙고 뭘 하고 있나?
저를 이세상 이시대 청주라는것에
오늘 안에서 살게하셨으니
주님의 이름은 감사와 찬미를 받으소서
제가 하는일을 통하여 당신의 영광이 되도록 당신의 뜻대로
저희를 당신의 뜻대로 인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