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에는 일어나 강론을 올린 다음 누워서 묵상을 하는데
툭 드는 생각이 <내가 왜 살지? 왜 죽지 않고 살지?>였습니다.
문득 드는 이런 생각에 당황이 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하루를 더 살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분들에게는
이것이 얼마나 불경스런 것인지 생각하며 송구스러웠습니다.
어쨌거나 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왜 이런 생각이 느닷없이 드는 것입니까?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 그 이유가 금방 나왔습니다.
코앞으로 다가온 사순절 때문이었습니다.
사순절이 다가오면 저는 은근히 또는 무의식적으로 긴장을 하는 편인데
그제 밤 사순절이 다가왔음을 각성하는 차원에서 카니발을 한 터여서
이렇게 계속 살아도 되는지 깨어나자마자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살아지는 대로 살았는데 그래도 되는지 물은 겁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제가 삶을 선택하지 않았고 살아지는 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도전 없이, 그러니까 내가 도전을 하지도 받지도 않는 삶을 살다보면,
그래서 편안한 일상에 마냥 안주하다보면 삶이 마냥 나른해지면서
왜 사는지 그 목적이나 이유를 슬그머니 잃게 되고
그래서 삶의 의미마저 잃고서는 왜 사는지 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때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무엇을 한참 또는 한동안 하고 있는데
내가 왜 이것을 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드는 경우 말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삶이 지루하고 지겹기까지 하잖아요?
노상 노는 사람에게는 노는 것이 따분하고 지겨워
노는 것도 아니고 쉬는 것도 아니며 고문일 뿐이지요.
마찬가지로 삶이 죽음의 도전을 받지 않으면
삶이 아무 재미도 의미도 없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하는 것처럼 굶주림이 있어야 맛이 있습니다.
고통과 기쁨은 정비례라고 하듯 고통이 있어야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무릇 모든 것은 반대의 것이 있어야 있습니다.
밤이 있어야 낮이 있습니다.
무가 있어야 유가 있습니다.
사가 있어야 생이 있습니다.
악이 있어야 선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의 실존적 의미를 알려면 양단을 봐야하고,
그래서 오늘 신명기는 생명만 보고 죽음은 아니 보려는 우리에게,
행복만 보고 불행은 아니 보려는 우리에게 양단을 다 보라고 합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그리고 외면하던 것을 직면하고 안 보던 것을 봤다면 이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하는데 이에 대해서 오늘 신명기는 또 말합니다.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제 양단을 보면서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앞서 봤듯이 선택을 해야지만 그것이 나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빨간색흰색 옷이 있는데 그중에서 선택한 것이 내 것이 되듯
삶을 선택하지 않으면 살아지는 거지 그 삶이 내 삶이 되지 못합니다.
아무튼 시장이 반찬이듯
생명과 삶이 맛깔스러우려면
죽음과 굶주림을 반찬삼아야 함을 성찰하는 사순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