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귀먹은 이에게 악담해서는 안 된다.
눈먼 이 앞에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 된다.
너희는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오늘 레위기의 말씀은 이런 식, 이런 조입니다.
곧, “이웃에게 이러이러 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우리가 인간을 대하는 것의 차이와 단계입니다.
보통 사람들, 다시 말해서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오늘 레위기의 말씀처럼 사람을 대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이웃을 그저 이웃관계로만 보고,
자기와의 관계에 따라서 이웃을 봅니다.
그래서 오늘 레위기의 말씀처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이웃을 보지 않습니다.
나와 이익관계일 뿐이면 이익을 공유할 수도 있고, 사기를 칠 수도 있으며,
나와 애증관계일 뿐이면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할 것이며,
나와 경쟁관계일 뿐이면 시기와 질투를 할 것이며,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으면 그가 죽건 말건, 잘되건 말건
사랑도 미움도 없고 아무 얽힘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레위기는 이웃에 대해 이것은 하지 말라,
또는 이것을 하라고 하면서 그 뒤에 꼭 “나는 주님이다.”를 덧붙입니다.
내가 너희의 주님이니 너희는 이웃에게 이렇게 하거나 하지 말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인간관계의 가장 낮은 단계, 신앙이 없는 단계는
이웃을 대할 때 하느님과 아무 상관없이 이웃을 대하지만
신앙의 단계로 올라서면 주인이신 하느님을 봐서 이웃을 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때 ‘내 얼굴을 봐서 그 사람 좀 잘 대해줘.’라고 부탁하지요.
예를 들어 내 친구가 나이 먹어 명예퇴직을 하였는데
제자의 회사에 취직을 시키며 제자에게 나를 봐서 잘 좀 해달라고 하지요.
오늘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그렇게 당부를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웃을 대할 때 나를 보고 그들을 잘 대해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을 뒤집어 생각하면 잘 대해주지 않고 막 대하면
당신을 생각지 않기에 이웃을 막 대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보고 이웃을 보는/대하는 단계보다
한 차원이 높은 단계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웃을 바로 하느님으로 보고 대하는 단계이고 관계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이웃에게 한 것이 바로 당신에게 한 것이라고 하심으로써
결국 이웃과 당신을 동일화하시는 것입니다.
무릇 모든 성인들이 이런 차원/경지에 도달한 분들인데
프란치스코 성인도 나환자의 관계를 통해 이런 경지에 도달한 분이지요.
내가 싫어하고 두려워하던 나환자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내가 피하고 싫어하던 사람과 일들도
곧 예수님이 지셨던 그 십자가가 되어 기꺼이 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강의 때 수십, 수백 번 얘기한 바지만
지금 내가 싫어하는 그 사람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고,
내가 지금 하기 싫어하는 그 일이 바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입니다.
오늘도 그리고 이 사순시기에 우리는
이 단계를 향해 한걸음 또 한걸음 나아가도록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