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향한 갈망은 초월을 시도한다.
성장기의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강한 집념은
과잉보호라는 모습으로 성장을 막는다.
추락하지 않도록 미리미리 손을 쓰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추락을 막아주는 것은 아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넘어진 사람만이 넘어졌다가 일어서는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스스로 서 있기 위해는 수없이 넘어진 후에야 균형을 잡는다.
자전거를 배우거나 스케이트를 배울 때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넘어지기를 허용하지 않는 사람은 인생의 균형을 잡지 못한다.
넘어짐은 수치가 아니다. 넘어져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수치다.
법과 규범은 필요하다.
놀이가 재미있으려면 놀이의 규칙을 잘 알고 지켜야 한다.
성장기의 아이들에게는 적당한 질서, 규율, 일관성이 필요하다.
일정한 제약을 받지 않고 방치되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제한된 상황 속에서 단련되지 못한 사람은 성장을 멈춘 아이와 같다.
책임, 죄의식, 불안과 공포 같은 상황 속에서
대처하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엄격했던 부모, 규칙을 잘 지켜야 했던 수도원,
가혹했던 코치, 과제를 많이 내주던 선생님, 성숙한 사람은 이들에게 감사한다.
인생의 후반을 사는 나이에는 그런 규범들이 필요하기보다 방해가 될 때가 많다.
자유를 향한 갈망은 초월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법을 지키는 것이 내적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마음 깊이 자리 잡은 억압된 분노와 상처를 안고
관계가 단절된 상황에서 열심히 주일을 지키는 신자들,
성장은 복음적 불안정 속에서 서서히 이루어진다.
창조적 긴장이라 할 수 있는 이 불안정은
상처받기 쉬운 상태로 나를 너에게 개방하려는 움직임이다.
위로부터 받는 사랑 안에서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연다.
율법과 자유는 이 긴장을 통해 사람을 성장시킨다.
진짜 같은 가짜들
진실은 누구와 싸워서 이겨야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안전하고 우월한 나를 만들려는 시도들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전혀 다른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게 할 뿐이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체제 전복적이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꼴찌의 인생같이 보여도 첫째인 사람들을 부르셔서 도구로 쓰신다.
이들은 가난하고 단순하며 보잘것없는 사람들이다.
숨겨진 선을 알아보시는 그분은 그들 안에서 누룩으로 일하신다.
밖으로 확산하는 선, 앞으로 나아가는 여정에 그들과 함께 일하신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
그 잔치에 초대된 그들은 거기서 한없이 자신을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자유에
참여함으로써 자유를 누린다.
그 자유 안에서 창조적 긴장, 복음적 불안정은 해방된 기쁨으로 주변을 비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