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가 사라진 들녘에는 거둘 것이 없다.
가치의 무게를 달고 공로의 자로 재는 하느님,
빈틈없는 정의를 요구하고 엘리트만을 사랑하는 하느님,
승자와 패자를 나누고 상벌을 내리시는 하느님,
그것은 사람이 만든 하느님이다.
우리 가운데는 그런 하느님들이 많다.
하느님으로 둔갑한 사람들은 입으로만 살면서 조작된 선을 증명하려고 자신을 높인다.
젖먹이가 눈앞에 무엇인가를 보면 그것을 목표로 삼고 전력을 다해 입으로 가져가듯
하느님과 연결된 사람은 땀에 젖은 몸으로 일상의 궂은일을 하고 산다.
손에 물을 묻히고 발에 흙을 묻히는 일이 그들의 일상이다.
누군가가 알아주는 일과 상관없이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그 일을 한다.
함께 사는 이들의 마음들을 살피고 그들의 필요를 말없이 메운다.
전체 그림 안에서 작은 부분들을 보기 때문에 작은 일에 전부를 쏟아놓는다.
하느님을 닮는 것 그것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나뭇가지와 뿌리와 기둥이 나무이듯
부분들을 포함하는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은
놓아버릴 수 없는 것, 놓고 싶지 않은 것,
죄의 기쁨이 주는 잠시의 행복과 흥분에 머물러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허용하시는 분
당신의 적들과 죄의 기쁨 속에 사는 죄인들을 내동댕이치는 분이 아니시다.
내가 닮으려는 그분이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든다.
내가 개입해서 도움이 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허용하려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젖먹이의 단순한 목표가 어른이 되면 사라지는 현상을 본다.
목표가 사라진 들녘에는 거둘 것이 없다.
눈앞의 이익과 편안함과 즐거움만 있을 뿐이다.
그것들은 사라지고 지나가는 것들,
그것을 붙들려고, 유지하려고, 소유하려고, 지배하려고 싸우고 경쟁하고 죽인다.
그것이 하느님의 본성을 닮으려는 사람이 할 짓인가?
남아있는 여생을 아름답게 살기 위해서는
정직하고 겸손하게, 그리고 단순하게 선을 행하는 것,
그것이 악을 물리치는 유일한 대책이 아닐까!
그것이 최선의 목표가 아닐까!
무지에서 출발하여 무지의 지혜를 터득하기까지는
많은 것을 배워야 하고 많은 것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임을 배웠다.
참으로 앎의 문제는 모르는 데서 끝난다.
지혜는 알 수 없는 신비와 더불어 의심 속에서 성장하지만
자유 안에서 행복을 누리기 때문이다.
2019, 8,30
원불교 선방에서 월피정 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