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배우는 학교
하느님을 발견한 사람, 발견된 하느님을 만난 사람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관계적 사랑을 배운다.
아름다우시고 자비하시며 넓은 마음으로 완전하게 포용하시는 하느님을 깨닫고 나면
자유로운 응답으로써 관계를 재설정하게 된다.
삼위일체의 관계적 사랑은 나를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 흘러간다.
그것은 깨달음의 결과로 응답하는 것이지 사랑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먼저 사랑하시는 분이시며, 선하시고,
언제나 다가갈 수 있으며, 거저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공짜로 주시는 하느님에게서 부담을 느끼는 이유는
하느님의 자유를 통제하거나 조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는 사랑의 본질로 하느님의 속성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유에 초대된 사람이며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로 다른 사람들을 자유롭게 한다.
삼위일체의 하느님 사랑은 전능한 힘이 아니라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법”(야고보 2,12)으로 심판하신다.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만드는 사람은
사람마다 중심을 두는 보편적 사랑을 거부한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이 주변에 흘러넘치는 것을 부인하거나
저항하며 멈추게 만든다. 그것이 죄다.
저항과 거부로 하느님의 사랑을 제한하고 자신을 지배적 위치에 두려 하는 사람은
영적인 것보다 물질적 재물을, 감정보다 사고를, 직관보다 과학적 사실을 내세우고
내면적 상처를 인정하기보다 술과 스포츠를 통해 잊어버리려고 하며
즉각적인 만족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쏟아놓는다.
또한, 하느님이 주신 자유를 자신만을 자유롭게 하려다 자유를 잃고
누군가를 통제하고 조종하려다 받는 스트레스 속에서 병에 걸리거나 죽어간다.
자유를 잃어버린 고아들,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어느 철학자가 말했듯이 그들과 함께 사는 건 지옥이 된다.
하느님의 자유는 이러한 지옥에서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하신다.
사람을 살려내는 하느님은 죽음으로 살려내는 생명이시며 상처 입은 치유자시다.
그분은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법”이 무엇인지 당신 스스로 보여 주셨으며,
이 길로 우리에게 안내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인도에 따라 지옥이 된 관계로 내려가 관계를 재설정한다.
삼위일체 안에서 관계적 사랑을 배우는 사람은 죽으면서 살린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자유에 참여하는 자유로 자유를 누리기 때문이다.
자유를 배우는 학교,
자유 없이는 사랑도 없다.
자유롭지 못한 나는 오늘도 새벽부터 자유를 배우러 학교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