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 없는 사랑을 배우는 학교
변화를 거부하고 변화에 저항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자신의 업적과 공로로 바꾸기를 좋아한다.
잘 지키고 잘 바치는 것으로 자신을 의롭게 만들고
하느님의 선을 자기 것으로 대체시키면서
그것이 거룩한 삶이라고 포장하거나 과시할 때가 많다.
면밀하게 말하면 그것은 가짜다. 하느님의 선을 훔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내가 선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선하시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아버지의 자비 아래 있다.
반면에 내가 개입되면 아버지의 자비를 해친다.
자신을 중심으로 구축한 나라에서는 아버지의 자비가 필요 없다.
그것을 자만심이라고 말하고 죄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고
아버지의 자비와 은총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자신을 좋아하지 않고, 숭배하지 않고,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못살게 하는 하느님,
늘 무엇이 아쉽고, 속이 옹졸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쉽게 공격하는 하느님,
온유한 자비보다 진노하고 빈틈없는 정의를 요구하게 하시는 하느님으로 만드는 건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조건 없이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자비가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은
마침내 그분 사랑에 굴복하고 자기를 없애는 일에 착수한다.
그분의 통치, 그분의 다스림에 자신을 맡기기 때문이다.
그분의 다스림은 자비의 다스림이기에 자유롭다.
우리는 거기서 편하게 숨 쉰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가 제한할 수 없는 자비다.
하느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표준과 척도로 세우는 사람들은
단순하게 하느님을 닮으려고 한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으로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려고 한다.
용서의 사람 예수께서 실천하셨던 사랑을 배우고
그분을 닮아가려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조건 없는 사랑을 배우는 학교에서
나를 없애는 자유를 배우고 마음 바꾸기를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