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자비와 은총의 형벌
우리는 죄를 지으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는
징벌하는 정의라는 논리 속에서 살고 있다.
죄인은 이 세상에서 아니면 내세에서라도 벌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은 죄인으로서의 죽음이 아니었지만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인 우리를 대신해서 벌을 받았다고 믿는다.
우리 죄를 대신해서 보상했다는 것이고 대신해서 처벌 받았다는 것이다.
속죄와 속량, 죗값, 몸값이라는 교리가 말하는 것도 그것이다.
그렇다면 자비로우신 아버지께서 당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지 않으면 당신의 진노를 가라앉힐 수 없다는 말인가?
아버지의 정의가 아들을 죽이는 정의라고 생각한다면
사랑과 자비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가?
“사랑하면 죽을 수밖에 없다.”
할 수 없이가 아니라 자진해서 죽는 죽음이다.
자유롭지 않은 사랑, 강요된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를 저지른 이들에게
변화와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기회임을 보여준다.
죄보다 자비가 클 때, 죄는 힘을 잃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사람과 경험자들만이 아는 신비다.
여기서 회복하는 문이 열린다.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로마5,20)
죄를 비추는 자비를 경험하면
진실을 말하고 자기 허물을 털어놓고
그렇게 해서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하느님은 언제 어디서나 완벽한 자유를 행하신다.
지키고 바치는 것에 상관없이
우리의 죄와 선행과도 상관없이
당신의 성실성에 근거하여 일하신다.
철저하게 아버지의 일을 하신다.
그것이 은총이다.
“야훼가 내리는 형벌은 그들을 일방적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당신의 계약을 당신 편에서 끝까지 지키는,
그렇게 해서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에제 16,63)
명백한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오히려 극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며 당황하는 모습처럼
죄의 크기보다 자비가 크면 죄는 그렇게 힘을 잃는다.
우리가 변해서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변하게 하시는 것이다.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하려 하지도 않고,
사랑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그러한 우리에게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은총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협박과 죄책감, 도피와 압력으로는 변화를 이루지 못한다.
벌이 무서워서 하는 일이 사랑이겠는가?
우리의 죄는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 앞에 얼굴을 붉히며
변화와 회복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는 은총의 형벌이다.
은총이 형벌이라면 누가 거절하겠는가?
그러나 과연 사랑과 자비와 은총을 받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