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에 꼭 해봐야 하는 질문 ( 1/2페이지)
예수께서는 왜?
십자가에서 처형되셨으며 그 죽음의 의미와 메시지는 무엇인가?
이 질문 앞에 있는 사람은 신앙의 역사를 새로 써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여기에 대한 답을 알게 되면 하느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사라지고
자신이 실천하며 따라야 할 모범으로 계시 된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 사랑이
결국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결과였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사랑에 현장에는 고난이 자리를 잡고 있다. 고난이 없는 사랑은 없다.
나와 다른 사람을 받아들여야 하고
자기 생각과 반대되는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속죄양을 만드는 세상에서 속죄양으로 처형되신 예수라고 믿는 신앙은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왜곡하거나 축소 시킨다.
해마다 사순절이 되면 나는 예수께서 온갖 수난의 현장에서 느끼셨을 고난에 대해
깊은 생각에 머물며 내 믿음의 뿌리를 살펴보곤 한다.
그제는 재의 수요일이었다.
머리에 재를 받으며 현재의 내 인생에 예수님의 죽음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내 인생의 모든 고비마다 남긴 흔적들을 돌아보며 그 이유를 발견하고 싶었다.
하느님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비전은
구약성서에 나타난 고대 종교들로부터 철저하게 벗어난 것이었다.
신이 제단에 바쳐진 사람과 동물과 곡식을 먹는 대신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의 몸 자체를 우리가 먹도록 주신다는 것이었다.
“너희는 받아먹고 마셔라, 이는 내 몸과 내 피다”
이러한 사실은 대가를 계산하는 사고방식의 논리를 없애버렸다.
사랑은 어떤 대가로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은 우리가 바치는 어떤 것 때문에,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아버지는 자녀들에게서 무엇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을 준 사람에게만 무엇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 똑같이 햇빛과 비를 내려 주시는 분”이시다.
(마태 5,45)
죗값의 대가로 하느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처형되셨다는 사고방식에서 나온 이론이
대속론이라고도 불리는 속죄론이다.
속죄론의 중심에는 하느님 아버지의 보복적 정의라는 개념이 숨어있다.
원죄로 말미암아 낙원에서 추방된 죄를 지은 인간은
죄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아버지의 분노를 잠재울 수 없다는 논리다.
그래서 신이시며 동시에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죗값을 치렀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가 자신의 희생을 선택하여 우리 죄인들을 대신하여 처벌을 받아
정의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켜 하느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게 되었다는 이론이다.
인간의 죄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훼손된 하느님의 정의를
십자가에서 죽은 아들 예수의 피 흘리는 거래로 분노가 사라졌다는 것은
예수의 역할과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목적에 대한 심각한 오해로 이끈다.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을 그렇게 이해하게 되면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신 말씀과
실천들은 의미를 잃고 만다.
사랑 자체이시며 온갖 선의 근원이신 아버지께서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셔야만
분이 풀리신다는 이야기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론이다.
나는 11세기 켄터베리의 안셀무스로부터 만들어진 이 속죄론과
내가 소속된 수도회의 창설자 사부 성프란치스코와 프란치스칸 신학자 성보나벤투라와
그의 뒤를 이은 둔스 스코투스의 ’육화의 영성‘과
‘예수님의 죽음은 하느님께서 자유롭게 선택하신 사랑의 계시”라고 말했던
그의 신학 사이에서 나는 내가 믿고 살았던
신앙적인 삶 전체를 바꿔야 하는 심각한 고민을 해야 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답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복음의 본질적이고 핵심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와 인식이 없다면 내 믿음에 물을 대주는
수로가 끊겨 생명의 에너지를 공급받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작은형제회 관구 홈페이지에 내가 쓴 여러 글 중에는 이러한 나의 고민이 담겨있다.
나는 가톨릭교회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죗값을 대신 치르신 분으로 이해하며
내 인생의 절반을 보냈다.
이런 논리와 이론에는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사법적 정의는 수많은 이들의 양심에 치명적인 흔적을 남겼다.
벌 받지 않기 위해서라면 어떤 명분으로라도 행동하는 동기를 바꿔야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그분의 뒤를 따르거나
그분께서 실천하셨던 사랑과 자비보다는 율법과 계명 준수와 무엇인가를 바쳐야만 했다.
그로 인하여 도덕적 성취는 무엇보다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죗값을 희생이라는 것으로 대신하려 했다.
자기의 죄로 인하여 하느님의 진노가 발생하였고 진노를 멈추게 하려면 희생을 바쳐야 했다.
그래서 잘 지키고 많이 바치면 다른 사람보다 더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처럼
철저하게 자신을 통제하려고 모든 정성을 쏟으려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할수록 자아도취라는 그물에 걸려 자신이 만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현재 가톨릭 신자들이 바치는 기도와 제물과 재능의 봉사,
교회 운영과 관련된 그러한 봉사가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바쳐지고 있지 않은가?
또한 양심에 불안을 주는 죄책감이라는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내 탓이 아닌 네 탓이라는 책임 전가와 너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투사가
보편적인 일로 자리를 잡았다.
그로부터 속죄양을 만드는 일은 일상의 관계 안에서 보편적인 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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