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과 죄인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 9,13)
스스로 의인이라고 하는 자들,
바리사이라고 부르는 유형에는 희생제물을 바치는 일에 적극적이고 열성을 다하는 이들이며,
자신들의 희생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자들이다.
규범과 법규를 잘 지키고, 바쳐야 할 것들을 열심히 바치면서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잣대로 사람들을 재고, 자신들의 저울로 저울질하면서 심판하고 판단하고 평가한다.
그로 인하여 심각한 관계의 단절을 유발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기에 자기보다 못한 이들을 갈라놓고 자신을 꼭대기에 올려놓음으로써 심판관처럼 행동한다.
자신의 힘으로 도덕적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을, 의로움의 척도로 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희생을 바치는 것보다 하느님의 자비가 중요했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가 나를 통해 흘러가도록 하는 것이 그분을 따르는 기준으로 삼았다.
마태오는 세리였으며 이미 죄인으로 판명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세리 마태오를 당신의 제자로 삼았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을 당신을 따를 제자로 삼은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가 흘러가도록 하는 사람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사이가 아니라 죄인이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
의인과 죄인을 구분 짓는 기준은 바로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이
나를 통하여 흘러가도록 행동하는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의인이라고 하신 것이다.
아무리 제물과 희생과 기도를 많이 바쳐도 관계 안에서 실천되는 자비가 없다면 그 자체로 죄인으로 판명된다는 것이다.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복음을 읽을 때, 자신을 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더구나 많은 희생과 제물과 재능을 바치고 묵주기도를 수없이 바치면서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지만,
그러나 죄인 속에 자신을 포함해서 기도하는 일은 별로 없다. 왜냐하면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회개하는 사람이 되면, 즉, 자기만 알던 사람이 가난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변화되면,
자신들의 필요성을 채우려는 그의 회심의 행동들이
관계를 맺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회개를 위한 동기를 유발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그를 통하여 보여주시는 자비와 선한 행동들이 감동과 함께 아름다움과 매력으로 느끼게 되어
단절되었거나 거리를 두던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보다 자신의 회개를 위하여 노력하는 일,
즉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 변화의 삶을 사는 것만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신의 변화는 관계의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을 통하여 일하신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 (로마 3,9-10)
스스로 의인이라고 여기는 이들은
누군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선하심이 흘러가도록 놔두지 않는다.
헐뜯는 소리, 비난과 험담으로 관계를 악화시킨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바치는 업적과 공로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도록 부추기기 때문이다.
나는 열심하고 거룩하다고 여기는 이들이 하느님을 회피하도록
관계를 단절시키는 일을 너무나 많이 보았다.
그들은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여기면서
언제나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관계를 맺는다.
과연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자신만은 죄인이 아니라고 하면서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
들보는 보지 못하고 타인의 눈에서 티를 꺼내고자 하는 사람은
무슨 자격이 있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묵주기도와 자비의 기도, 15 기도와 여타의 많은 기도를 바치고
본당의 신심 단체에 가입하여 재능을 봉헌하고 제물을 바치면서 의인의 길을 계속 간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마태 9,13)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이 흘러가는 통로는 죄인들인 우리들의 삶이다.
우리가 죄인인 이유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가 흘러가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자비와 선을 자신의 잣대로 제한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죄라는 생각 없이 오로지 지키고 바치는 일에만 급급한 이들은
예수께서 바리시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자신의 거룩함과 의로움으로 지배하는 나라,
보편적 구원보다 사적 구원과 자신의 경건을 앞세우는 나라,
타자들과 분리되고 섬김이 없는 나라,
그것이 하느님 나라이겠는가?
자비의 통로요 선을 이루는 육화의 도구로써 죄인의 삶은
지금 여기를 하느님 나라로 바꾼다.
하느님의 선은 그 자체로 확산하는 선이다.
자비와 선한 행동들이 관계의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분노와 절망, 부정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을 받아들여
우리의 삶을 그 힘겨운 가장자리로 이끌어서
실패와 비극과 고통 같은 것들을, 하느님과 만나는 지름길로 만들고
실패와 비극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이들과 더불어 살면서 그들의 필요를 채우며,
하느님 안에서 깊은 만족을 누리고 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