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에 따르는 유혹
“우리한테는 이집트인들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으니
이집트인들을 섬기게 우리를 그냥 놔두시오” (탈출기 14,12)
고난을 통해 성장하는 과정에 항상 따라오는 유혹,
변화를 위한 성장통,
내적 권위를 지니기까지
죄에 따르는 일시적 기쁨으로 돌아가려는 무의식 속의 갈망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려는 이들에게 필수적으로 겪는 유혹이다.
내면적인 권위는 섬기는 권위다.
낮아지지 않고서는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라고 말씀하셨다. (마태 20,28)
섬기는 자의 권위가 변화를 가져오게 한다는 말이다.
섬기는 일은 위치의 변화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위치의 변화는 가난과 겸손이라는 고난의 강을 건너야 가능하다.
자존심과 체면의 손상이라는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섬김을 통해 안에서 밖으로 드러나는 권위는
모순과 역설을 통합시키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여 관계 속에서 행할 때 나타나는 인식이며 지혜다.
섬기기 위하여 자신을 내려놓고 내려가는 길은 행복한 내리막길이기 때문이며,
섬김을 통해 아버지의 자비와 선하심이 관계 속에 흘러갈 때
내면적 권위는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밝히기 때문이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일은 언제나 유혹을 동반한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겪으신 유혹이 말해주는 것이 그것이다.
눈앞의 이익과 즐거움과 편안함이 우리의 모든 갈망을 휩쓸어버리는 현실이다.
이것이 죄가 부르는 유혹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섬기는 일은 몸에 쓴 약이다.
성프란치스코는 “죄를 짓는 일은 몸에 달콤하고
주님을 섬기는 일은 몸에 쓰다.”라고 말했다.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예수께서 걸으셨던 그 길을 걷기보다
단지 기도와 전례에 참석하고 감사를 드릴 따름이지
자신들이 예수께서 걸으셨던 죽음과 부활의 길을 걷기 위해 나서지는 않는다.
예수님을 역사적 사건의 외적인 계시로 예배할 따름이지
안에서의 내면적 계시로 깨닫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전혀 변화하지 않은 채 남아 있고
‘너’만 변화하기를 바라고 하느님께서 ‘너’를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 놓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모순을 가슴에 품고 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고,
서로의 관계 속에서 발견되는 모순들이 무수하게 많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어떠한 시도들도
무용한 결과를 초래할 뿐, 아무런 해결책도 내놓을 수 없다.
단지 우리는 모순을 가슴에 품고 십자가를 받아들이면서
부활의 희망을 지니고 살아갈 뿐이다.
가장 분명한 것은, 그렇게 살다 보면 자신의 삶이 점점 자비롭게 되며
훨씬 더 참을성 있게 된다는 점이다.
함께 아파하는 자비심과 오래 참고 견디는 일은 내적 권위의 가장 큰 특성이다.
이러한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섬기기 위하여 내려가고 내려놓음에서 발생한다.
아버지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이 흘러가는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비심이 부족한 사람은 누구도 변화시킬 힘이 없다.
관계 속에서 섬기기 위해 자신이 쓸 수 있는 능력의 마지막 한계까지 몰렸다가 죽으면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서 발견하는 삶이 있다.
그것을 부활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죄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하는 죽음을 받아들인 결과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역사적 사건으로만 여기는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 죽을 수 없다.
자신의 삶과 아무런 연결이 없기 때문이고
예수님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죽고 부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따르기보다 우주적 지배자로 예배하는 일에 몰두하고
믿음이 사랑과 희망과 같은 삶의 실제적 문제보다
교리와 옳고 그름을 다투는 도덕적 성취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은
모험적인 영적 여정을 떠날 수 없다.
예수님을 따르기보다 믿어주는 것이 구원이라는 틀 속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파라오의 추격을 가까이 접했을 때
그들은 모세에게 대들었다. 그리고 노예로 사는 편이 낫겠다고 말했다.
죄가 주는 달콤함과 부드러운 노예 상태로 돌아가겠다는 말이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