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지도 자라게 두어라” (공존의 지혜)
하느님은 까닭 없이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주셨다.
완벽하기만을 기대하고 사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무상성을 이해할 수가 없다.
법과 계명을 잘 지키는 것이 완벽한 삶은 아니다.
자신에게 물어보자
왜? 나는 불완전한 것을 사랑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완벽한 것만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인류가 생겨난 이래 완벽하리만큼 산 사람이 있었는가?
죄인이 아닌 의인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는가?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완벽하고 의인만을 좋아해서 하느님 나라는 그런 사람들이 들어가는 장소라고 말씀하셨는가?
“가라지도 자라게 두어라,”
도덕적 성취의 경쟁에서 첫 자리를 탐하는 이들에게서나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들을 수 없는 말이다. 무상의 시혜를 받고 사는 우리가 기뻐할 줄 모르는 것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하는 데 시간을 소모하느라고 사랑받고 있는 사실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인생을 이만큼 살아보니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내가 구도자의 여행을 시작했을 때 가졌던 생각들은 대부분 가라지였으나 이제는 알곡이 되었고 나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가라지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나를 가르쳤던 이들의 말대로 가라지를 뽑는 데 시간을 낭비해버렸다면 내 인생의 가장 큰 은사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알곡으로 남게 될지도 모르는 것을 가라지로 생각하고 섣부르게 뽑아버린다.
반대로 내가 생각했던 장점과 은사가 최악의 실수를 저지르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것은 자만심의 결과였다. 나는 오랜 시간과 고난을 거쳐 비로소 알곡과 가라지를 분별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율법은 죄를 알려 주지만 성령은 율법의 진정한 목적과 의도를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신다. 여기서 분별력이 생긴다는 사실이었다.
교회를 구성하는 하느님 백성들인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예수님에 대한 불순종을 묵과해 왔고 그것이 죄인지도 알지 못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야망과 탐욕과 허영심, 그리고 자신이 우상이라는 사실도 모르면서 저지른 심각한 관계의 단절로 인하여 얼마나 하느님에 대한 이미지를 변질시켜 왔는지 모른다. 식별과 분별력을 잃어버리는 것은, 자만심에 빠져있는 눈멀음이었다. 거룩함과 의로움으로 무장한 가짜들의 무분별한 경외심이 수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눈멀게 했다는 사실을 감출 수가 없다. 그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 온유한 사랑,
그리스도 예수께서 행하시고 선포하신 복음의 능력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것은 분별의 문제였다.
눈에 보이고 수치심을 일으키는 죄악에 대해서는 예민하면서도 복음의 능력을 위축시키는 죄는 간과해 왔다. 율법적 해석을 사랑보다 우위에 두면서 희생을 강조한 나머지 관계 안에서 복음을 발생시키는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에는 둔감해졌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가라지를 뽑아낼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알곡과 가라지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 이다. 분별이 없으면 눈먼 채로 자기도취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은 가라지와 더불어 사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어떻게 해야 공존의 지혜를 배워 어둠과 빛이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는가? 에 달려있다.
나는 내 안에 자리 잡은 어둠의 실체, 무의식 속에서 나를 움직이는 분명한 실체를 먼저 발견해서 의식의 세계로 드러나게 만드는 일, 곧 자신의 한계를 믿음으로 표현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다가왔다, 내 안에 있는 어둠은 그 자체로는 악이 아니다. 그러나 내 안에 있는 어둠이 만들어내는 두려움이 가식적으로 행동하게 하고, 탓을 남에게 돌리게 하고 거짓을 말하게 하며, 그로 인하여 신뢰가 깨지고 관계는 단절된다는 사실이었다. 내 안에 어둠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존재라는 인식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내 안에 어두움을 인정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은 누구인가?
독점과 소유, 무지와 지배욕, 억압된 분노와 상처, 열등의식을 전수해 준 이들, 곧 어머니와 아버지, 교회의 사목자들과 더불어 내 주변의 관계들이다. 그들 자신의 어둠과 두려움이 나에게 전해졌다. 생각해 보면 어린아이 때부터 나에게 형성된 것은 대물림된 그들의 삶이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는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와 더불어 산다.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싫어할 뿐 아니라
평생 따라다닌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낀다. 나는 나의 무의식 속에 감추어두었던 것들이 나를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들보와 티끌”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나에게 하신 말씀이다. 나는 자신의 어둠을 심각하게 부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일수록 탓을 남에게 돌리고 뒤집어씌우면서 자신은 치유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나도 그런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어둠을 등에 지고 빛의 길을 간다. 밀과 가라지가 함께 섞여 그 길을 간다.
내 어둠이 관계를 힘들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 안에 있는 두려움을 받아들여 허용하고 놓아주어야 ‘너’를 받아들일 여백이 생길 수 있다. 가라지만을 뽑아버리기보다 더불어 사는 공존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사랑은 저절로 알게 되지 않는다. 보고 배우는 진리이며 행동하는 진리다. 웃음과 여유를 버린 사람들은 엄격한 도덕주의자처럼 산다.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구분하고 항상 자신을 우위에 둠으로써 단절된 삶을 산다. 인생을 선과 악, 좋고 나쁜 것, 죄, 지옥과 연옥의 관점에서만 보기 때문에 삶을 즐길 수 없다.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는 완벽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해왔고 필요 이상의 죄의식을 갖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완벽한 것만 좋아하신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만이 자신의 한계를 믿음으로 표현할 수 있다. 사랑받아야 사랑할 수 있다는 법을 예수님으로부터 배운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왔다. 사랑은 사랑에 의해 사랑이 된다. 받은 사랑에 응답하는 사랑으로 가라지와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운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