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현의 신비는 사랑의 신비
“자기가 하느님 안에서 산다고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1요한 2,6)
하느님과 연결된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를 예배하는 사람이라기보다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인간성에서 측은한 마음으로 돌보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그분께서 실천하셨던 관계의 진리를 배우는 여정입니다.
예배에만 초점을 맞추려는 사람은 관계를 넓히지 못하고
개인의 이익과 관련해서만 관계를 맺거나 유지하려 합니다.
보편적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몸소 가르쳐주신 예수님은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것보다 큰 사랑이 없다는 것을 당신의 삶으로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자유를 주는 일은 관계 안에서 현실이 되고 구체적 진실로 드러납니다.
사람에 대한 존중심은 타인의 자유를 조금도 헤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아버지에 향한 사랑이 없습니다.” (1요한 2,15)
“우리는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1요한 3,18)
프란치스칸들은 세상과 세속을 구분해서 이해합니다.
세상은 하느님의 자비가 넘치는 창조의 영역이며
하느님의 선하심이 숨겨진 장소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의 관계 속에서 숨겨진 하느님을 발견하고
발견한 하느님이 우리 관계의 중심이 되도록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속은 오로지 이기심과 자기중심적인 가치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들의 관심은 온통 자신에게만 머물러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과 즐거움과 편한 쪽에 무게를 두고 있기에 ‘너’를 받아들일 여백이 없습니다.
가족들 안에 이러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 가족들의 관계는 깨지고 맙니다.
부모로부터 대를 이어 물려받은 독점과 소유의 문화는 농경문화 속에서는 받아들여졌지만
이제는 관계의 단절로 나타나고 있으며 관계의 단절은 주변의 관계 안에서
또 다른 단절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억압된 분노와 상처는 차별과 편애와 사랑받지 못한 결과였으며
무의식 속에 갇혀있던 열등의식과 분노와 상처들이 만들어 내는 지옥 같은 삶에서
외로움과 고독과 우울함을 호소합니다. 또한 그러한 어둠을 잠시라도 잊어버리기 위해
술과 성과 마약 같은 중독성이 있는 대체를 찾지만, 공허한 결말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이 중심이 되는 사회가 되면서 더욱 심각한 절망감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허비하게 합니다.
어렸을 때는 저항할 힘이 없었기에 체념과 무의식 속에 가두고 살아왔지만
어른이 되어 자신의 힘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로 살아가고 있음은 너무나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며
더구나 이러한 악순환이 대를 이어 반복되는 현상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보고 듣고 배운 것이 그것밖에 없었으니까요.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 사랑이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사랑하는 나로 인하여 창조 때 받은 너의 순수한 사랑을 깨웁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1요한 3,23)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1요한 4,7)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1요한 4,16)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을 합니다.” (1요한 4,19)
사랑의 기원이 하느님께 있다는 요한 사도의 말씀은 우리 믿음의 기초를 이룹니다.
여기서 사랑은 먼저 움직이는 사람에 의하여 잠자던 사랑을 깨우고 전달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사랑을 깨닫게 된 것은
먼저 움직이신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인간성을 통해서였습니다.
은하계의 티끌에 불과한 내가 이 땅에 존재하게 된 이유와 과거와 현재까지
내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지금까지 살아있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셨기 때문입니다.
나 또한 대를 이어 내려온 가슴 아픈 관계의 현실을 경험했고
그것이 얼마나 뼈저린 인간사의 슬픈 역사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나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1 요한 4,21)
말씀과 전례 안에서 선포하는 성탄과 공현의 신비를 묵상하는 요즈음
먼저 움직이신 하느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믿음만이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 주며
하느님의 선하심은 내가 행하는 선을 통하여 누군가에게 전달된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가 나를 통하여 너에게 흘러갈 때,
사랑의 관계 안에서 깨닫게 되는 하느님의 현존,
성탄과 공현의 신비는 그렇게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하느님을 느끼게 합니다.
나를 송두리째 내어주는 관계의 현장에는 최상급으로 대하는 ‘너’가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으로 너를 대합니다.
사랑은 무게의 두려움도 없고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것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고
시간과 돈과 재능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고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무상성에 대한 응답은 그렇게 나를 통하여 너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공현의 신비를 사는 관계 속에 있으며 우리들의 몫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