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 있어라. 그리고 준비해라
우리의 목적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에 참여하면서 나에게서 내가 해방되는 삶이 믿는 이들이 누리는 기쁨이며 하느님 나라 행복의 현주소일 것입니다. 영적인 삶은 해방으로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해방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움직이는 내적인 에너지를 밖으로 드러내고 표현하는 데 자유를 사용합니다. 하느님의 매력에 이끌려 시작된 내적인 여정이 도구적 존재라는 인식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외적 여정과 연결되지 않으면 진정한 해방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내어주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내어주심에 참여하지 않으면 나에게서 내가 해방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대림 첫 주간에 듣는 주님의 말씀은 복음이 너와 피조물의 관계 안에 육화되도록 깨어서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미 오셨고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하여 관계를 돌보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나로 인하여 불편하거나 단절된 관계가 있으면 화해하고 용서를 통하여 관계를 회복하라는 말입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을 성찰하기보다 상대방을 비난하면서 탓을 남에게 돌립니다. 자만심과 우월감 속에서 나만 챙기겠다는 집념이 저지른 일상의 관계들을 살펴보면, 설치고, 미워하고, 헐뜯고, 우는 소리를 내면서 섣부른 판단으로 편 가르기를 한 결과가 결국 관계의 단절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감출 수가 없을 것입니다.
깨어 있음과 준비하는 마음은 일상의 관계들입니다. 무엇에 깨어 있어야 할까요? 깨어 있음은 예수께서 말씀을 통하여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현장은 관계의 현장입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일 공간이 없으면 너를 받아들일 공간도 없고 피조물을 통하여 돌보시는 하느님의 무상성과 보편성을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일 공간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내 마음 안에 나로 가득 차 있으면 하느님과 너와 피조물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내가 다스리는 나라, 내 이름을 빛나게 하거나 내 뜻을 관철하려는 집착에 함몰되어 쓰고 버리는 일회용처럼 하느님과 너와 피조물을 오로지 자신의 목적에만 이용하고 사용하고 목적을 이룬 다음에는 쓰레기처럼 버립니다. 눈앞의 이익과 눈앞의 즐거움과 눈앞의 편안함에 눈이 멀어 보고 또 보아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를 못하며, 코가 있어도 내를 맡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맛을 보거나 말도 하지 못하고, 손이 있어도 감각을 잃어버려 숨은 쉬고 있어도 생명을 잃어버린 죽은 사람처럼 산다는 말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우상이 되어버려 자신을 숭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우상에 빠지면 우상이 저지르는 일, 곧 사로잡히게 하고, 노예로 만들어, 결국 파멸하게 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나만 보입니다.
하느님과 사람과 피조물에 대한 존중이 사라지면 인간은 폭력만 남습니다. 벌써 힘으로 자리 잡은 돈과 권력을 이용하여 지배의 영역을 확장하는 데에만 관심을 쏟습니다. 인간의 비극은 여기에 있습니다. 개인과 개인, 가정과 공동체와 국가 사이에 오로지 힘겨루기만 하다가 인류가 공멸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저기 전쟁의 소식이 끝날 줄 모릅니다. 깨어 있음은 이렇게 어둡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하느님이라는 거울에 비친 나를 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개인의 마음에서 비롯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라는 거울은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 말씀입니다. 말씀에 비추어 나를 바라보게 되면 말씀을 받아들일 공간이 전혀 없이 살아온 자신이 보일 것입니다.
생각은 삶으로 드러납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에는 생각과 정신이 있고 의지는 그 마음을 통제하는 자유로부터 선택과 결단을 하도록 안내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 자유는 의미와 가치체계와 연결되어 있고 최고의 가치인 복음적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이 복음적 가치에서 우리 믿음을 드러내는 태도적 가치가 나옵니다. 깨어 있음과 준비하는 마음은 우리의 태도가 어디에서 나오고 무엇에 기초를 두고 있는지를 인식하고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예수께서는 섬김을 중심으로 관계를 시작하셨습니다. 통제의 역사로 점철된 인간의 관계들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자비와 선의 흐름이 너에게 흘러가도록 몸을 굽혀 내려가는 일과 섬기는 일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자유롭게 살려면 너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통제를 멈추고 허용하고 놓아줌으로써 제 몫의 자유를 찾게 해주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네가 자유로우면 내가 자유롭니다. 나만 자유롭게 하려고 너의 자유를 헤치면 둘 다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너를 받아들이는 일이고 너를 받아들이면 하느님을 받아들인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너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을 받아들일 공간과 마음의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순서가 바뀌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너를 사랑할 수 있지만 너를 사랑한다고 해서 반드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유로 가는 길에는 출애굽의 과정이 있습니다. 노예 상태에서 자유인으로 가는 과정에는 거부와 배반과 반역, 무시와 소외, 외로움과 고독의 사막을 거칩니다. 이러한 관계의 사막에서는 오직 하느님만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무상으로 돌보시는 아버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에 확신을 갖게 하는 때가 바로 그 사막에서의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가난을 배우고 겸손을 배우는 학교는 사막에 있습니다. 세속적 위로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그곳에서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하느님과 나 자신을 알기 시작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영의 활동에 마음을 열고 관계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준비한다는 것은 하느님과 너와 피조물을 받아들일 공간을 만드는 일입니다. 섬김을 중심으로 관계를 시작하신 예수님처럼 내려가고 낮아져서 허물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시간이 깨어 있는 시간이며 회복된 관계 안에서 자유롭게 자신을 내어주기 시작할 때 이미 그분을 맞아들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