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믿는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주일과 대축일에 사도신경이라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신앙고백은 12가지의 믿음 조항이 들어있는데 그 가운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심을 믿는다는 내용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산 이는 어떤 사람이고 죽은 이는 어떤 사람일까요? 생명이 살아있는 이와 생명이 없는 죽은 이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 숨 쉬는 사람이고 죽은 이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일까요? 살아있어도 죽은 사람이 있고 죽은 것 같이 보여도 살아 있는 사람이 있음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 밑에 앉아있지 않고 생명의 빛 속을 걷는 사람을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이 관계 안에 흘러가도록 자신을 주님의 도구로 내어놓는 사람입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탐욕의 계산기가 작동되지 않도록 날마다 선을 선택하고 결단하고 책임을 지려는 마음으로 하루를 설계합니다. 도구적 존재라는 말은 육화의 도구가 된다는 것으로써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 변화의 길을 걷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선포하신 말씀의 통치가 실현되도록 나의 자유를 내어 맡기는 사람입니다.
내어 맡기는 과정을 보면 주님 사랑의 매력에 끌려 낚이고, 붙잡혀 그분으로부터 사랑받는 나를 발견한 사람이 보이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다만 아는 건, 그 놀라운 일이 나에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게 전부입니다. 내가 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마리아처럼 그 일이 나에게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만을 알 뿐입니다. (루가 1,38) 놀라운 자비가 내 영혼과 몸을 적시면 사랑의 충격으로 자신을 보게 됩니다. 벌거벗은 나를 보게 되는 순간 내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보고 하느님 안에서 나를 알아보게 됩니다.
죽은 이는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탐욕으로 점철된 그의 인생에는 오직 유일한 관심이 있다면 자기만족을 위한 것들이 전부입니다. 이들은 숨을 쉰다고 해도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심각한 관계의 단절로 인하여 외롭고 우울하고 견디기 어려운 공허감이 마음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자신이 지배하는 영역을 넓히기 위하여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적 달성을 위해 욕심을 부리다가 방해를 받게 되면 즉시 폭력을 행사합니다. 약육강식의 논리로 약한 이들을 잡아먹는 동물의 왕국처럼 자기 왕국으로 만들기 위해 에너지를 소진하고 맙니다.
심판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는 실재라 할 수 있습니다. 압도적인 사랑의 거울 앞에서 자기 스스로 느끼는 충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밤새워 노력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을 때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물을 쳤더니 상상할 수 없는 물고기가 잡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가 주십시오” 이렇듯 거대하고 압도적인 사랑 앞에 섰을 때 느끼는 초라한 자기모습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사실이 나에게 이루어집니다. 마침내 벌거벗은 나의 실상이 드러나서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산 이와 죽은 이의 심판은 죽은 다음에 오는 것이라기보다 이 세상에서의 경험하는 실재이며 관계의 심판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관계가 단절된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며, 관계 안에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이 흘러가도록 자신을 내어드리는 사람은 생명을 얻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연이면서 바닥인 하느님의 사랑 앞에 백기를 들고 어떻게 해서든지 선의 흐름에 자신을 내어놓은 사람이며,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관계적 사랑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그랬고, 바오로 사도도 그랬으며, 성프란치스코를 비롯한 성인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