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하고 겸손한 사랑을 배운 사람은 너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위로부터 사랑을 받을 때 변화가 가능합니다. 신비체험은 나를 몸소 선택하시는 하느님에 의하여 내가 선택되었음을 알게 되고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으로 창조하셨기에 내가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나는 온전히 하느님에 의하여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손에 들려있는 창조의 도구요 육화의 도구로써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면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내가 바뀔 때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내가 바뀔 수 있습니다. 사랑받아야 변할 수 있고 선하신 하느님을 관계 안에서 발견해야 내가 변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판단보다 하느님의 판단을 좋아합니다. 판단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러나 판단하고 심판하고 단죄하는 이들은 인과응보의 가치체계에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압도적이고 거대한 신비에 연결되어야 생명의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너그러우심과 받아들이심은 언제나 나를 능가하시고 나는 나를 사랑하는 어떤 누구보다 더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나의 불완전성과 미숙하고 자주 넘어지는 현실 안에서도 그분은 나를 사랑하고 계심을 압니다. 그분께서 나를 창조하실 때 조금 모자라게 만드셨기에 그분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고 다른 이들을 통해 나에게 보여주는 사랑으로 내가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부모들은 자녀들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습니다. 꾸짖고 야단쳐서 죄를 들춰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사람을 부끄럽게 하여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그 방법은 효과가 없습니다. 자녀들에게 매를 들고 벌주기를 좋아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은 어른이 되어 자기 자녀들을 가르칠 때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공포와 불안과 죄의식을 부추겨 부끄럽게 함으로써 그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녀들은 스스로 문을 닫고 아무도 신뢰하지 않으면서 더 큰 상처를 입지 않으려고 자기방어에 온갖 수단을 동원하게 할 뿐입니다. 그런 방법은 효력이 없습니다.
우리를 알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방식은 언제나 확실한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랑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시지 않으며 아버지의 품으로 안내하십니다. 이러한 은총을 깨닫지 못하고 우월감에 중독되어 사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 더 놀랍습니다.
내어주는 사랑을 받은 우리는 내어주는 사랑으로 응답함으로써 기쁨과 자유를 누립니다. 잃었던 아들을 품에 안으시는 아버지의 자비가 작은아들과 큰아들에게 내면의 변화를 주었듯이 우리는 하느님의 너그러움과 받아들임을 통해 사랑받고 있음을 더욱 확실하게 느낄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품에서 사랑받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