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사랑을 알아야 도구적 존재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레오파고 법정에서 아테네 시민들에게 한 바오로 사도의 설교 내용을 보면 지금 우리가 자주 잊어버리는 사실들을 일깨워 줍니다.
“그분은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므로 사람이 만든 신전에서는 살지 않으십니다. 또 하느님에게는 사람 손으로 채워드려야 할 만큼 부족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으십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갑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느님을, 사람의 기술이나 고안으로 금이나 은이나 돌을 가지고 만들어 낸 우상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사도 17, 19-29)
창조는 신앙의 기원
우주 만물을 존재하게 만든 하느님의 창조와 창조로부터 시작된 존재의 기원은 우리 믿음의 기초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너무나 쉽게 간과하고 잊어버리는 것, 그것은 창조에 관한 하느님 사랑일 것입니다. 창조는 사랑에서 시작된 하느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분출되는 생명의 에너지가 내어주는 사랑으로 드러난 선의 실제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세상의 주인이시십니다. 그분은 부족함이 하나도 없으시기에 사람의 도움이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인과응보의 틀에 갇혀 사는 사람은 이러한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바쳐야 주시는 분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먹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오감(五感)으로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큰 사랑으로 돌보아 주고 계신지를 발견하면서 살아갑니다.
하느님의 무상성과 보편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 때문에 쓰레기로 버린” (필립 3,8) 바오로처럼 인과응보로 시작된 가치체계를 송두리째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길에서 겪는 첫 번째 위기입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거저 주시는 하느님의 무상성과 편애와 차별과 특혜가 전혀 없는 보편적 사랑에서는 아무도 제외하지 않을뿐더러 선한 사람과 죄인을 구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행실에 따라 받는다는 인과응보와 착한 사람 상주고 악한 사람은 벌주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하느님은 용서하시는 아버지이셨습니다. (루가 15장) 그분은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은 구체적 현실에서 경험합니다. 즉, 우리의 관계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 내어주시는 사랑을 받아 내어주는 사랑으로 응답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우상에 빠진 인간은 자신을 우상화합니다. 우상은 우리에게 세 가지 잘못을 저지르게 합니다. 첫째 사로잡히게 하고, 둘째 노예로 만들며, 셋째로 파멸시킵니다. 행복을 약속하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이렇듯 자신이 우상에 빠져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들의 현상을 보면 자아도취와 우월감에 중독되어 자신의 위치를 관계의 맨 꼭대기에 두고 있기에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일상에서 겪는 관계의 심각한 갈등의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을 복음적 이상으로 포장하여 명분을 만들고 윗자리에 앉아서 통제의 칼을 휘두릅니다. 소유를 늘리고, 반응을 조작하여 인정과 칭찬과 사람들의 평가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많은 양의 기도문을 외우고, 전례에 참석하고, 교회 신심 단체에 가입하여 여러 가지 활동을 함으로써 열심하고 거룩한 이미지를 보여주려고 안간힘을 기울입니다. 자신의 업적과 공로로 하느님을 움직일 수 있다는 자만심이 광적인 행동을 하도록 부추기기도 합니다. 이들에게는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은 가지처럼 연결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울도 없습니다.
육화의 신비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에게 전해진 복음과 나에게 다가오신 하느님의 사랑과 진실을 만나게 되면, 그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을 보게 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사는가를 깨닫게 되어 나의 죄와 내 자아의 어두운 이미지 속에서도 내 자신의 영혼을 부수고 하느님 자비의 품으로 들어가서 너를 먹여 살리고 싶어 합니다. 창조의 사랑을 이해하면 도구적 존재로써의 삶을 살려는 영의 활동이 자신을 개방하도록 부추깁니다. 압도적인 하느님 사랑에 눈뜨게 되어 자신과 자신이 먹여 살려야 하는 이들의 필요성을 돌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더불어 더 깊이 들어가는 사람들만이 자신을 객관화시켜 자신에 대하여 정직한 평가를 하게 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자유, 안전한 품, 그분의 넓으신 자비와 선하심이라는 거울에 반사된 자신을 보게 되면 가슴이 열리어 더 깊고, 더 담대한 용기, 더 깊은 자기 굴복, 자신의 착각과 자만심이라는 내면의 죄와 어두운 그림자와 대면하여 선으로 악을 이겨내기 위하여 씨름하게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라는 거울과 빛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만큼 내면의 죄와 그림자가 잘 보이고 그 그림자 안에서 평범하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만심이 만든 어둠이 이기심과 함께 자기를 중심으로 만들려는 유혹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에서 나오는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자유는 인간적 쾌락이나 즐거움과는 구별되는 매우 깊은 내적 감정입니다.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 얻게 되는 역설적 신비입니다.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서 겪게 되는 내적 죽음이 상실을 체험하고 견디고 기다린 뒤에 비로소 마주하는 영적 기쁨과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이러한 죽음과 부활의 신비 안에서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머물기를 갈망하고 삼위일체 하느님의 관계적 선에 참여하면서 내적인 변화와 외적인 변모로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하심을 드러냅니다.
창조의 사랑을 깨닫고 이해할 때 도구적 존재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을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